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11월 06일 13시25분
존재의 심연에 흐르는 강
김스미의 미술산책〈59〉 송만규 ‘섬진 팔경’
암울한 80년대는 한국의 반체제 저항 미술운동, 민중미술(1979-1994) 시대였다. 현실주의 미학을 실험한 작가들은 다양한 매체로 모순의 시대를 고발하고 투쟁가를 불렀다. 그림은 압수당하고 경찰서를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지금이야 빛나는 계급장이 되었지만, 살벌한 시절엔 숨 막히는 상황이었다. 송만규는 83년 10월 익산에서 전북 최초 민중미술운동 소집단, ‘땅’을 결성한다. 1985년 민족미술협의회, 87년 겨레미술연구소를 열여 전북지역 민중미술의 중심에 선다. 그 후 민미협을 나와 홍성담, 최열 등과 함께 강성그룹인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민미련)을 출발시킨다. 민미련의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 문제로 경찰에 강제 연행되는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 그가 언제부턴가 민족의 젖줄, 강을 그린다. 임진강에서 만경강, 섬진강까지, 민중의 혼을 보듬고 흐르는 저 거대한 강을 그린다.
낮은 데로 흐르는 강줄기를 들고 묵자의 겸애사상을 실어 송만규는 또 다른 의미의 정신혁명을 꿈꾼다. 그의 섬진강에는 동학의 못다 핀 한이 맺히고, 한국전쟁 후 파르티잔의 서러운 저항이 서리고,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순정이 흐른다. 어쩐지 말간 화가의 성품이 느껴지는 강가에, 들꽃들이 지천으로 피었다. 까닭을 알 수 없는 처연함이 장렬한 카타르시스를 선물한다. 가을이 내린 붉은 강의 현란함조차 송만규의 붓끝에서 소박하고 푸근하기 그지없는 아낙네가 된다. 그의 강은 도도히 흐르기를 거부하고 가슴팍을 다 내주고 빈 몸으로 흐른다. 어느 봄, 여름과 가을, 눈 내리는 겨울, 스케치북을 들고 강가를 거닌 송만규의 언어는 날마다 비워지고 또 비워진다. 민족미술을 향한 청춘의 꿈들이 승화된 강가에 곱디고운 할미꽃이 피었다. 자연에 기대어 스스로를 정화하고 동화되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송만규의 그림 속 나무에 여린 싹들이 다시 돋아나고, 어느새 나무와 강물이 노랗게 물든다.
‘구담 가을’은 가을이 흐드러진 마을을 휘감아 도는 섬진강가 서정이다. 짙은 먹색, 쓸쓸한 나목들의 퍼포먼스다. 뿌리 깊은 역사의 뒤안길에 선 고독한 무명 씨의 독백처럼 전경과 차경의 대비가 두 개의 세계로 이어진다. 언덕 너머 굽이쳐 흐르는 하얀 섬진강은 침묵의 여백으로 돈다. 먼 먼 심연에서 들리는 무수한 이야기를 차마 다 할 수 없어 허옇게 흘렀다. 땅의 빛깔을 닮은 꽃들과 연한 먹빛의 조화가 깊은 순수를 말하는 송만규 예술의 유토피아다.
누구나 어느 순간이 되면 어떻게 살았는가? 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해야 한다. 대답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화가는 그림으로 말해야 한다. 깨닫고 체험한 것들이 진실로 다가올 때 감동은 배가 된다. 화가가 심혈을 다해 그려온 세상, 그 속에 담긴 사상과 인간적 고뇌에 깊이 공감하기 때문이다./화가 김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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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4-11-07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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