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09월 25일 16시08분
[금요수필]지렁이도 치매인가
신팔복
맨발 걷기를 하려고 학교 운동장에 나갔다. 심폐기능을 높여주고 혈액순환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발바닥이 거친 모래에 찔려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걷는데 젓가락만 한 지렁이가 힘겹게 꿈틀대며 긴다. 몸통에 달라붙은 모래는 아교풀을 붙인 듯 떨어지지 않는다. 피부가 마른 지렁이는 숨이 가빠서 괴로운 것 같다. 분명 길을 잘못 들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부채로 떠서 풀밭에 옮겼다.
다음 날, 같은 장소에서 또 지렁이를 보았다. 기어 나온 흔적을 보니 고작 두 뼘도 안 되었다. 역시 많은 모래를 몸에 붙이고 기고 있다. ‘지렁이도 이제 살 만큼 산 것인가!’ 하며 퍼뜩 ‘지렁이도 치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작은 개미들이 그 옆을 바쁘게 오가고 있어 위험해 보였다.
요양원이 없었던 지난날, 우리 마을에 치매를 앓는 할머니가 계셨다. 다리가 약해 걸어 다닐 수 없는데도 자꾸만 길로 나오셨다. 고운 얼굴은 어디로 가고 비녀 없이 헝클어진 머릿결과 장작개비 같은 모습이다. 길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밀면서 집 밖으로 나오시니 며느리가 기저귀를 채워줬고, 바지의 엉덩이 부분에 옷감을 덧대어 두툼하게 기워 입혔다. 자동차 길이라 위험하기도 했다. 이웃 사람이 만나면 “식사하셨어요?” 하고 인사하면 아예 “응, 시장에 간다고? 하며 엉뚱한 말로 대답을 하기도 했다. 아들 며느리가 논밭으로 일하러 나가면 집에 있는 것이 갑갑한 모양이다. 평범한 일상을 잊어버려 참 안타까웠다.
젊은 시절 그녀는 부지런하고 깔끔한 아낙네였다. 세배하러 가면 좋은 음식을 내놓았고 웃음 섞인 덕담을 잘 해주셨다. 시부모님 모시고 자식들도 잘 키워냈다. 동기간에도 우애가 좋아 가족이 화목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그들을 전혀 모른다. 동네 사람들도 나이 많아 생기는 병으로 인정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함께 이야기 나눌 사람조차 없이 혼자서 본능적 행동만으로 몸을 유지할 뿐이다. 노인성 치매는 뇌의 활력이 떨어져 인지능력(認知能力)이나 기억력(記憶力)이 사라져 생기는 병이라 했다. 출생아보다 노인 인구가 더 많아지는 요즘 우리 사회에서 미룰 수 없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더욱이 의료혜택이 적은 농촌에선 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누구나 살아온 삶은 위대한 것이다. 숭고한 삶의 끝자락에 이웃과 가족으로부터 존경받아야 할 텐데 모든 인격이 무너지고 빈 껍데기처럼 취급받는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특히 뇌의 노화가 치매의 원인이라 한다. 건강한 생활을 위해서는 주기적 건강검진과 치매 검사가 필수적이다. 조기에 원인을 발견하고 전문의와 상담해 가며 적절하게 대처해야 한다.
치매 노인은 결국, 유족들이 슬퍼하는 통곡 소리와 조문객의 애도 속에 엉덩이로 밀던 그 길로 꽃상여에 모셔져 뒷산으로 떠났다. 운동장 지렁이도 며칠 뒤 풀숲에서 연주하는 귀뚜라미의 장송곡 속에서 개미들만이 모여 바쁘게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다.
신팔복 수필가는
한국문인, 전북문인, 진안문인, 전북수필, 행촌수필, 은빛수필, 영호남수필 회원
지면 : 2024-09-27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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