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4년 09월 18일 16시40분
[오늘의 길목]전문가여 독립하라
귀국 후 변란의 가능성을 묻는 선조에게 이들은 서로 다른 대답을 하였다. 정사 황윤길은 “풍신수길은 눈빛이 반짝거리고 담력과 지략이 있는 사람으로 반드시 침략해 올 것”이라고, 부사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아 마땅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되며 조선을 침략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한다. 선조는 김성일의 보고를 더 신임하여 왜군의 침입을 크게 경계하지 않은 채 임진왜란을 겪는 바람에 피해가 커졌다는 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1년이나 일본을 살피고도 이러한 실책이 벌어진 것이 참 답답한 일인데 왜 이런 실책이 일어난 것인지를 살펴보면 더 한심하기 짝이 없다. 이 일을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문헌들을 보면 당시 사정은 이랬다. 당시 조선의 선비들은 동인과 서인이라는 두 당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선조 시대에는 동인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통신사로 파견된 정사 황윤길은 서인이었고, 부사 김성일과 종사관 허성은 동인이었다.
부사 김성일이 선조에게 정사 황윤길과는 정반대로 이야기하자 같은 동인인 유성룡이 그 이유를 물었다. 이에 “사실 나도 왜적이 침입해 오지 않을 거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선조에게 왜적이 침입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답변한 이유를 “서인인 황윤길이 왜적이 침입해 올 것이라고 답하였는데 거기에 동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한다.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종사관 허성이 겪은 일을 보면 당시 선비들의 태도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종사관 허성은 김성일과 같은 동인이었다. 왜군의 침략 가능성을 묻는 선조의 질문에 같은 동인인 김성일과는 달리 조선을 침략해 올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답하였다. 이후로 허성은 반대파인 서인 황윤길의 의견에 동의했다는 것 때문에 오랫동안 동인들의 외면과 따돌림을 겪게 되었다.
통신사들의 의견이 엇갈렷음에도 조정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각지에 성을 새로 쌓고 장정들을 징집하여 군사훈련을 시작하는 등 전쟁에 대비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로 인해 민심에 변화가 생기고 서인들의 정국 참여가 늘어나자 동인들은 ‘왜적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서인들이 세력을 잃어 민심을 교란시키는 술책’이라고 주장하며 ‘오늘날 두려운 것은 섬나라 도적이 아니라 민심이니 민심을 잃으면 견고한 성과 무기가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라는 상소를 계속 올리며 전쟁 준비를 반대하고 나섰다.
조정에서 이러한 다툼을 반복하면서 결국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고, 그 결과 7년에 걸친 전쟁을 겪으며 온 국토가 파괴되고 수많은 백성들이 생명을 잃는 참혹한 일을 겪고 말았다.
국가와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 어처구니없는 일은 450년 전의 일이다. 충분한 역량을 갖춘 사람들이었지만 전문가로서의 판단보다는 내가 속한 그룹과 진영의 입장을 더 우선하고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오직 진영의 정치적 이익을 합리화하는 데에만 활용한 폐해이다. 더 끔찍한 것은 450년 전의 일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정국 현안으로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는 문제들의 해법은 결국 전문가들의 몫이다. 정치인들이 정치적 해법으로 타결한다 하지만 정치적 해법이란 정치적 이해관계를 주고 받는 타협이지 사안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사안의 본질은 사안 하나하나에 대한 전문성을 갖고 있는 전문가들이 답을 내줘야 한다. 문제는 전문가들에 있다. 전문가들이 정파나 진영의 논리와 상관없이 오직 과학적 진리에 기초한 답을 내줘야 함에도 과학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취사 선택하여 입맛대로 재구성하고 그것만이 진실인양 설파함으로써 정파와 진영의 뒷배나 봐주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되는 상황이 늘어나고 있다. 진짜 전문가가 없는 사회에는 갈등의 해소도 미래를 위한 추진력도 얻을 수 없다.
/문윤걸(예원예술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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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4-09-19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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