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09월 12일 13시10분
[금요수필]배움의 갈증
정남숙
친정 작은 할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어느 날, 동네에서 이장(里長)을 선출하는데 누군가 작은할아버지를 추천하셨는데 막무가내로 안 하시겠단다. 가까운 친구가 권해도 소용이 없었고 종래에는 성질을 부리며 문을 박차고 나가셨다. 우리는 이장 답(畓)도 있고, 가을이면 이장 미(米)도 거둬 주는 이장을 서로 하려고 하는데, 왜 하지 않으려 하시냐고 할아버지께 물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할아버지의 고백을 들을 수 있었다. 유생(儒生) 집안의 부잣집 막내아들이라 증조부께서 독서당(獨書堂)을 가르치셨다. 그래서 천자문으로 시작, 소학, 사서삼경은 물론, 고전(古典)을 골고루 섭렵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글 읽을 기회가 없어지고 글을 읽고 쓸 필요를 느끼지 않아 글을 잃어버렸다고 하셨다.
설마 배운 글을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그러나 그게 사실이었다. 말은 해도 글을 읽고 쓰지를 못한다고 하셨다. 누가 알까 봐 우리 집안 식구들만 아는 비밀로 하고 덮기로 했다. 휴가차 내려온 손녀 아이스크림을 사려고 마트에 다녀오는 길에, 다시 그 할머니를 만났다. 무엇을 하든지 자기 이름 하나 쓸 줄 몰라 항상 주저하며 자식들의 숙제 한 번 가르쳐주지 못했는데, 글을 배우고 나서는 세상이 환하게 보이며 모든 일에 자신감이 생긴다고 한다. 정식 중학교도 가보고 싶다, 밤을 지새울 것 같다.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를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 자식들을 의사, 박사, 교수로 키워내고도, 정작 자신은 글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집안에 갇혀있던 내 안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공부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이들이 많음을 대변하고 있다.
자신은 가난한 집안의 맏딸로 태어나 남동생에게 공부를 양보해야 했고, 어린 동생들을 업고 집안일을 돕느라 배움은 생각지도 못하며 살았다고 한다. 무식이로 살아왔던 지난날을 생각하며 처음엔 부끄러워 망설였지만, 배울수록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 시작한 것이 벌써 4년이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자서전 쓰는 방법도 배우고 있어 꼭 쓰겠노라 다짐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의 기쁨을 오래 간직하게 하려면 나라도 그의 푸념을 들어주고 싶어 자리를 뜨지 못했었다.‘내 나이가 어때서~ 공부에 나이가 있나요,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인데,’가 주제가라며 노래까지 구성지게 불러준다. 행복해 보였다. 배움에 굶주린 그 갈증(渴症), 나도 알고 있어 덩달아 나도 기뻤다.
정남숙 수필가는
'대한문학’ 수필 등단
수필집: ‘노을을 닮고 싶다’ ‘난 아직도 꿈을 꾼다', ‘역사의 마당에서 전통이랑 놀아보자’
'대한문학 작가상’, 한국문인협회 선정 ‘올해의 수필인 상’ 수상
전북문인협회, 전북수필, 행촌수필, 은빛수필 회원. 국립전주박물관, 전주기독교역사기념관 문화해설사
지면 : 2024-09-13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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