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09월 10일 13시46분
색채와 형상으로 해방 경험을 길어 나른다
전북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여성 예술가라는 공통분모를 지닌 강정이, 김완순, 김이재, 송수미, 유경희 등 5명의 아티스트 CHROMA그룹을 초대, 전시를 갖는다.
'주역의 해방들'이란 전시명은 얼핏 해방의 주체를 주목하는 듯 보이지만, 뒤바뀐 어순이 가리키는 주체는 주역이 아닌 ‘해방들’이다. 전시는 예술가가 해방을 경험하고 살아내는 과정과 그 일환으로서 빚어내고 직조되는 작품세계를 조망하고, 이들의 개인적 서사는 예술이라는 프리즘을 거쳐 각각의 색채와 형상으로 해방의 경험을 길어 나른다. 참여작가 강정이, 김완순, 김이재, 송수미, 유경희는 도자와 섬유공예 분야에서 현대적 형식을 탐구하면서도 전통적 재료인 한지를 접목한 신작을 선보여 공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안한다.
인터뷰가 선행된 이 전시는 개별의 작품세계를 비롯하여 각 구성원의 개인적 경험과 작가로서의 삶 사이를 매개하는 도구로서의 예술을 조명하고자 기획됐다. 여성 해방의 관점에서 바라본 CHROMA의 구성원들은 모두 가부장적 사회의 보조적 역할로부터 탈피하고 스스로 주체성을 보전하거나 회복한 경험을 지닌다. 이는 창작자로서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각 분야에서 주역의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해방의 실현을 가능케 한 열쇠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방의 또 다른 재료는 강렬한 자유의지와 물적 토대이다. 후자는 특히 구조적 한계를 넘기 위해 매우 현실적인 필요조건이기에, 해방을 둘러싼 교차적 관점들은 계속해서 논의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HROMA의 해방론은 예술을 통한 전복 가능성을 활짝 열어둔다.
강정이의 삶에서 해방은 ‘이미 주어진 것’에 가깝다. 개인으로서 그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할 때에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지고 자유의지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경험들은 기본적으로 예술적 자유의 토대가 되어왔으며, 자연스러운 자기해방의 경험으로 이어져왔던 것이다. 반면 작가로서 강정이에게 ‘해방’이란 작업에서의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작가는 도예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간주하는 동시에 정형화된 틀에 도전하는 과정으로 여긴다. 흙을 마주하고 마음껏 형상을 빚어내는 과정 자체, 그리고 정형화된 틀 너머에서 결과물을 얻어내는 작업에서의 자유가 곧 해방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김완순(교동미술관 관장)이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소유(遡遊, 2024)'는 한지죽을 반죽해 형을 만들고 그 위에 뜨개질로 직조한 오브제를 결합해 제작되었으며, 단순하게 조형화된 집의 형태는 교동미술관의 외형과 유사한 인상을 준다. 작가의 태피스트리는 한지사를 이용한 씨실과 날실의 반복적인 교차로 사람과의 인연·관계·상생과 같은 ‘연결망’을 연상케 한다. 오랜 꿈을 실현함과 동시에 김완순은 작가로서의 실천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으로 공헌할 수 있는 활동에 대해 고민하다가 2007년 교동미술관을 설립한다.
김이재가 이번 전시에서 소개하는 '마음으로 전하는 이야기'(2004~2024) 시리즈 또한 섬유와 한지로 겹겹이 층을 만들어 면을 형성하고 일정한 흐름의 패턴이 생성된다. 여기서 닥의 섬유질은 털과 같은 텍스처를 만들어 내며, 화면 위로 드러난 결들은 작가의 내면에 자리한 심상을 시각화한다. 그 때문에 김이재에게 작업은 개인적, 사회적 자아가 교차하는 정체감을 확인하는 수행의 과정이다. '마음으로 전하는 이야기' 시리즈 중 두 작품은 작고한 남편이 생전에 작업 과정을 함께 공유한 경험이 담겨있어 작가가 가장 애정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송수미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비움’의 개념과 연결되며, 그의 작품세계 전반을 이해하는 단서이다.비움의 대상은 작품에서 주요한 소재로 삼고 있는 사물들에 녹아있는 무형의 존재들이며, 특히 시간과 기억을 비롯해 사회적 관념까지 포함한다. 송수미는 과거와 현재가 계속해서 상호작용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자유로운 상태가 되기 위한 회복의 일환으로서 ‘비움’을 정의한다. 작가에게 비움의 반대말은 채움이 아닌 과거이고 기억이기 때문이다. 지나간 기억을 비워내는 과정은 단지 덜어내고 소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계속해서 꺼내보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과정을 무릅쓰는 일에 가깝다.작가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도리어 비워낸 까닭은 오랫동안 ‘삶과 죽음’을 병치시켜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을 직조해 온 작품세계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유경희는 수류화개 시리즈에서 거시적 시간관, 생성과 소멸, 그리고 변하지 않는 본질이라는 키워드를 집약하고 교차시킨다. 여기서 인간의 생애는 자연의 순환으로 이해되며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는 해골, 누에고치와 같은 상징적 기호(오브제)와 연결되어, 계속되는 순환 속에서도 변치 않는 본질을 인식하도록 한다. 예컨대 생성과 소멸을 은유하는 누에고치 형태의 사이잘삼(Sisal Hemp)은 자연의 순환구조를 은유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 출품된 신작 '하월(夏月, 2024)에서는 초창기 고분유물과 누에고치가 병치되어 더욱 선명해진 작가의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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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4-09-11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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