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07월 31일 15시07분

나의 달항아리 그림 이야기

〈57〉 김스미 ‘달항아리에 스미다-전설(LEGEND)’

삶의 수레바퀴는 이정표가 없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간이다. 그래서 평생 방법론적 구속의 틀과 필사의 투쟁을 벌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끔찍한 행위를 향해 소리 지르고, 조금이라도 할 말을 할 수 있으면 행운이다. 예술은 외마디 비명의 통로로서 제격이다.

2010년, 숙청 대상이 되어 만신창이가 된 사람이 있었다. 가마에서 내뿜는 검은 연기가 산모퉁이를 휘감는 어느 산골로 숨었다. 살아남기 위한 도피였다. 백자 그릇을 굽는 황토가마가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인적이 없어 마루에 앉아 기웃거리는 사이, 시원한 한 줄기 바람이 사정없이 반긴다. 도무지 현실 같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뱃속까지 말개지는 달항아리와 사랑이 시작됐다. 저잣거리 생활을 청산하고 나는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인고의 시간을 넘어 그림을 들고 또 다른 장터에서 이모작을 시작했다.

‘인생 새옹지마다.’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림과의 운명적 만남을 이었다. 예술은 연습이 다가 아니고 본능적 재능임을 알게 되어 매 순간이 딜레마였다. 그래서 늘 전쟁이었지만 그림 안에서만은 주체로서 자유로웠다. 총 맞은 경험도 있겠다, 이래 저런 쓰라린 내공도 생겼겠다, 무모한 자신감은 언제나 나를 일으키는 바람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떠나 살 수 있는가? 관계의 실마리가 인간이란 생각이 들어 몇 년간 사람 얼굴만 죽도록 그렸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떠올랐다. 달항아리가 내게 준 치유의 에너지를. 달항아리는 이렇게 다시 내게로 왔다. 더 이상 억울한 분노의 항아리가 아니었다. 어떤 모험을 마친 온화하고 따스한 항아리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힘을 가진 존재다. 숨 막히는 여름이 지난 후 각성의 시간을 달항아리와 함께 깊이 호흡한다. 항아리의 빙열을 한 땀 한 땀 이으며 수행의 희열을 경험한다. 이제 달항아리는 나를 떠나 보편적 삶에 대한 은유를 담은 존재의 심연으로 표현하였다. 달항아리의 파장을 통해 심리적 안정과 정서를 보듬는 색채 심리의 무의식적 치유의 모티프를 평면으로 형상화하였다. 달항아리의 조형적 특징을 회화로 이행시키는 작업은 형태적 이미지 대신 항아리 본연의 감성적 이미지 표현에 주안점을 두었다. 배경 추상의 회화적 퍼포먼스로 가시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를 연결하여 구성의 조화로움과 지적 판타지를 그린다.

나의 달항아리는 기쁨과 슬픔, 연민과 희망을 담아 꿈이 투영된 실존이 되었다. 달을 품은 항아리에 존재의 염원을 실어 사유의 세계로 안내한다.

한국미의 정수인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를 모티프로 한 나의 달항아리 그림은 조형적 균형과 안정된 통일감으로 현대적 감성을 강조한다. 일상에 지친 공허한 현대인들의 마음 한편을 따뜻한 이야기로 채우고 싶었다. 자기성찰의 깊은 속내를 꺼내 소통하며 덩달아 행복해지고 싶다. 2019년, 1920년 〈김스미전〉, 2021년 〈영원한 꿈〉, 2022년 〈We are Dreaming〉, 〈삶에 지친 그대에게〉, 〈추억을 소환하다〉, 2023년 〈달달(達達)한 판타지Ⅰ,Ⅱ〉, 2024년 달항아리에 스미다 〈전설, LEGEND〉는 출생연도와 관련된 띠 동물을 12 지신으로 의인화한 디자인을 오마주하여 작업하였다.

단순했던 달항아리가 시간이 갈수록 이야기가 늘어난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돌려라. 풍경마저 침묵처럼 조용하게....어떤 주제일지라도 오래 묵어 더욱 진솔해져야 한다. 게다가 만리장성같이 견고한 화단의 벽을 실감하지만 나는 담담하게 이 길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