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07월 22일 07시48분
검은 상처의 발화
[책마주보기] 한강의 '채식주의자'(장금이)
표제작인 '채식주의자'와 '몽고반점', '나무불꽃' 등 세 편의 중단편 연작인 이 작품집은 서술방식부터 은유적이다. 주인공인 화자가 말하는 일인칭 고백체의 통상적인 서술방식이 아니라 주변 인물인 남편, 형부, 언니(그녀로 객관화됨)가 말하게 함으로써 주인공 영혜의 존재를 타자화 혹은 사물화시킨다. 어느 날 피웅덩이에 비친 자신을 보는 기괴한 꿈을 꾼 이후 채식만을 고집하던 영혜는 기존 관념과 충돌하게 되고, ‘몽고반점’이 의미하는 존재의 순수성을 지향하다가 결국에는 정신병원에서 나무가 되고자 한다. 이 같은 영혜의 정체성은 슬프다 못해 기괴하다. 손, 발, 이빨, 세 치 혀, 시선 등 몸을 이루는 것들은 무엇이고 죽일 수 있고 해칠 수 있지만 가슴만은 아무도 해칠 수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것은 가슴뿐”이라며 브래지어를 거부하는 영혜의 행동은 육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환멸을 내포하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의 채식이 기호식품이 아닌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읽히는 것도 이러한 영혜의 정체성 때문이다. 이처럼 기존의 통념을 전복시키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적 서사는 가부장적 권위와 폭력을 드러내고 있으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기괴성이 극대화된다. 더하여 영혜의 식물적 상상력을 통해 사물과 관념 사이의 허위에 가득 찬 위계적 연결 관계를 분리시키는 것은 물론 사물들을 해방시켜 타고난 본성에 맞는 자유로운 결합과 이상적 생명성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인식은 대상을 주관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인식론적 리얼리즘을 파생하고 작품에서 허무와 죽음으로 나타난다. 보통 개인이 상처를 받게 되면 밖으로 표출하게 되는데 영혜는 스스로 나무가 되겠다는 자기 안의 몽상을 통해 고통스런 현실의 도피처를 만든 것이다.
이 작품은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권위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며, 현실에 대한 반항을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옷을 입혀 독자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은 정화를 통해 참된 세계와 참된 인간의 회복에 이르려는 작가의 말하기 방식이다. 한강이 자서에서 밝혔듯 “생생한 고통과 질문으로 가득 찬” 물음은 우리 삶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전통적 윤리관의 민낯을 보여주며, 그로 인해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이 시대에 던지는 깊고 검은 상처의 발화이다.
장금이 작가는
부안 출신
'솔바람소리문학회’ 회원
2023년 ‘익산 디카시 최우수상’ 수상
지면 : 2024-07-23 7면
http://sjbnews.com/822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