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4년 06월 30일 14시35분
[메아리]‘환경 유전체’, 식물 병해충 진단의 새로운 도구
이처럼 간접적인 방법으로 인간이나 생물의 행동 양상을 추론하는 연구는 환경학이나 생물학 분야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최근 하천이나 호수 등, 수생 생태계를 분석할 때 ‘환경 유전체학’이 유용한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예전에는 배를 타고 들어가 직접 수생생물을 채집하면서 서식 종류와 밀도를 조사했는데 지금은 해당 생태계 내의 전체 유전체를 분석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수생생물의 분변이나 대사물질 등, 생명 활동의 결과로 생성되는 흔적 물질의 ‘환경 유전체’(eDNA)를 분석하면 그 생태계 내 생물 종 다양성과 생활 습성 등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법은 2020년 전남대학교 연구팀이 수행한 수생 환경 연구에 사용된 바도 있다. 연구팀은 수돗물에서 검출되면서 불안감을 준 깔따구류 유충의 분포를 조사하고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기 위해 검출장소에서 거리가 먼 8곳 취수장(한강 3, 낙동강 4, 제주 1)의 퇴적물에서 깔따구류의 eDNA를 분석했다.
이런 방법을 식물 병해충 통합 진단에 활용해 보면 어떨까 제안해 본다. 벼가 재배되는 논이지만 실제로 논에는 벼 외에도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다. 피와 방동사니 등 수생식물과 민물새우, 소금쟁이 등 다양한 동물과 곤충이 논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다. 이들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도 논 생태계를 구성하는 주요 생물 종이다.
인간이 심야 활동을 하면서 핸드폰 통화기록이라는 흔적을 남기듯 이들 역시 논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긴다. 분변 등의 배설물이나, 꽃가루, 종자, 탈피각 등 생명현상의 흔적들은 논물에 고스란히 담겨있을 것이다. 이런 흔적들은 고유의 유전자를 가질 것이고 이들 유전자를 분석하면 해당 논에 어느 생물이 존재하고 밀도가 어떻게 되는지 통합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기상이변과 작물 재배 형태 등 농업 환경 변화로 식물 병해충이 크게 문제시되고 있으며 발생 양상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무쌍하다. 매년 새로운 병해충이 발생하고 해마다 병해충 종류와 피해 정도가 급격하게 달라진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벼 도열병이 2021년 전북 지역에 대발생해 큰 피해를 준 사례는 예측이 쉽지 않았다.
도열병뿐 아니라 벼에는 깨씨무늬병, 흰잎마름병 등의 병과 벼멸구, 이화명나방, 등의 다양한 병해충이 발생하며 이들의 예찰·진단과 방제는 농업 현장의 최우선 과제이다. 그렇지만 병해충은 워낙 종류가 많아서, 이들을 종별로 하나하나 예찰·진단하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최근 의료기술의 발달로 가능해진 피 한 방울을 이용한 사람 병의 통합 진단처럼 논물 한 컵으로 다양한 논의 병해충을 한 번에 진단할 수 있는 기술 개발이 필요한 시점이다. 시군별로 운영되는 농업기술센터의 예찰포 등 지역별 거점이 될 수 있는 논의 환경 유전체를 사전에 분석하면 환경 유전체의 밀도가 높은 병해충을 대상으로 방제전략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의 혈관과 같이 폐쇄적이고 제한된 환경이 아닌 논과 같이 광범위한 환경에서 eDNA를 대표할 수 있는 시료를 어떤 방법으로, 어느 시기에 채취할지, 대상 병해충 조합을 어떻게 구성했을 때 예찰·진단의 경제성이 있을지 선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그렇지만 4,300여 종과 3,000여 종에 이르는 병과 해충을 하나하나 예찰·진단해야 하는 어려움을 생각해 볼 때 병해충을 한 번에 진단할 수 있는 기술의 매력은 매우 크다.
실현 가능성은 차치하고라도 눈부신 과학기술 발전과 인공지능의 시대, 새롭고 창의적인 도전은 가치가 있다. 그 가치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입되어야 해결할 수 있는 비효율성을 극복할 수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eDNA를 이용한 새로운 식물 병해충 예찰·진단 시스템 개발을 기대해 본다./박진우(국립식량과학원 작물기초기반과장)
전북을 바꾸는 힘! 새전북신문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지면 : 2024-07-01 9면
http://sjbnews.com/820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