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06월 26일 09시19분
[금요수필]유통 기한
정남숙
하나보다 둘이라야 마음 편하고, 알맞게 보다 남아야 직성이 풀리는 대책 없는 나의 성격이다. 그러니 쓸데없는 애착과 소유욕에 차곡차곡 쌓아만 둔다, 무엇이든 있음으로 안정감을 얻고, 많아야 여유로움을 느낀다. 풍요로운 젊은이들은 알지 못하는 아픔의 시절, 빈곤의 세월을 살아온 결과다. 과거의 습성이 내 삶에 덕지덕지 붙어 떨어지지 않고, 나와 평생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쉰밥도 물에 씻어 먹고, 곰팡이가 슬어도 그 부분만 떼고 먹던 그 시절, 버림과 유통 기한은 낭비였고 사치였다.
나의 인생 유통 기한은 영원할 줄 알았다. 10여 년 전 귀향할 때, 농장 한편에 예쁜 전원주택을 짓고, 그 옆에 미혼모복지시설을 만들 계획이었다. 나에게는 수십 종의 자격증이 있지만, 막상 미혼모시설에는 사회복지사 자격이 필요했다. 사회복지 교육을 이수하기 위해 조금 먼 곳에 있는 대학교 평생교육원에 등록했다. 세 학기 동안 손자뻘 되는 젊은 학우들에게 왕언니로 불리며, 등하굣길이 나의 꿈을 이뤄주는 실크로드 같았다. 그런데 유통 기한이 지난 내가 도리어 보호받아야 할 처지인데, 누굴 돕겠냐는 동생의 충고는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내 나이도 잊고 나대던 나의 이상은, 현실과 동떨어진 사상누각임을 알게 됐다. 우리 인생에도 유통 기한이 있어, 이미 시효 지난 지 오랜 골동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했다. 내 전공을 살려 가슴앓이 같이 품고 살던 내 고향을, 제대로 알려주고 자랑하고 싶어 문화해설사의 자격을 갖추고 싶었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 안내하는 것보다, 전문자격을 갖추면 전주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고, 역사와 문화의 품격도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유통 기한이 지났다며 거절이다. 가정에서도 효도라는 이름으로 노인들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 한다. 그러나 무리하지 않는 한 적당한 소일거리는 있어야 한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아직은 사회와 가족의 연대 속에서 소속원임을 인정받고 살아있다는 삶의 확인이다. 내 의식이 있는 한 자신 있게 살고 싶었다.
자원봉사라는 이름으로 국립전주박물관에서 활동하고 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잘했다 칭찬받지 못해도, 외롭거나 서운해하지 않음은, 나만이 즐기는 내 자존감을 실현할 수 있음이다. 유통 기한에 발목 잡혀 멈추거나 주저앉지 말자.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세상이 정해준 유통 기한에 구애받지 말고 나 자신과의 약속을 이행하며, 내 성실한 의지와 자존감의 성취를 맛보는, 나만의 기쁨을 저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살아 숨 쉬는 그날까지 내 유통 기한은 내가 정하면 되는 것이다.
정남숙 수필가는
'대한문학’ 수필 등단
수필집: ‘노을을 닮고 싶다’ ‘난 아직도 꿈을 꾼다', ‘역사의 마당에서 전통이랑 놀아보자’
'대한문학 작가상’, ‘올해의 수필인 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선정, ‘올해의 수필인 상’ 수상
전북문인협회, 전북수필, 행촌수필, 은빛수필 회원
국립전주박물관, 전주기독교역사기념관 문화해설사
지면 : 2024-06-28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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