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4년 06월 09일 14시11분

[신생전북론]집강소는 공화정보다 몇 곱절 깊은 민주다

27. 집강소와 전주화약

지방자치가 국가하도급자치라면
집강소체제는
형식은 관민상화였으나
전라도 56군현의 연합의 연합에 의한
한님들의 자기통치체제였다

박홍규 판화 절명시

전주 객사 풍패지관

1. 한님들의 자기통치체제 집강소와 국가

지난 5월 31일은 동학농민군이 전주부성에 입성한 날이고 6월 11일은 관민상화(官民相和)

의 전주화약일이다. 거버넌스(governance)니 협치니 하는 것들이 대개는 지식권력이거나 선거동맹이기 십상인 세태에서 보면 1894년의 집강소는 형식은 관민상화였으나 일하는 한님(한민족의 한과 인칭격 님)들의 자기통치체제였다. 대의공화정이 아니다. 집강소체제는 근대국민국가 혹은 근대민족국가와는 차원이 다른 체제다. 봉건도 아니고 근대도 아니었다. 집강소는 오래된 인류의 약속이고, 내일의 유토피아에서 온 것이었다. 지금의 지방자치가 국가하도급자치라면 집강소체제는 전라도 56군현의 연합의 연합에 의한 한님들의 자기통치체제였다. 이 집강소는 1945년의 해방공간에서 자생적, 자발적인 인민위원회로 이어졌다. 정당과 국가보다도 한님들이 우위에 선 체제의 나라였다. 나라와 국가는 다르다. 나라는 통치기구 국가를 포괄한 범주다. 국가 소멸이 나라 소멸은 아니다. 나라는 자연의 나라 동물의 나라, 배달겨레의 나라로 쓰인다. 집강소체제는 국가가 없는 상태지만 무정부는 아니다. 연합행정체제(입법,사법 포함)가 기존의 통치기구 국가를 대체한 것이다. 연합행정체는 국가가 아닌 다른 이름 말 그대로 연합체다. 필자는 '민주국가'란 불과 물의 형용모순이고, 민주의 이상은 집강소 같은 연합체라고 본다. 집강은 본디 성균관 학생회이거나 향리의 자치기구 소임이었다. 지금으로 하면 이장이라 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소설 형식으로 집강소의 의미를 짚어 본다.

2. 국가의 빗장을 열다

감사 김학진은 쪽구름(반월동)에서 덕진을 거쳐 패서문(전주서문)에 당도했다. 전주부성 북쪽에 공북문(恭北門)이 있으나 그 누구도 공북문으로 출입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북쪽에 계신 임금을 향해 공손함을 다 하라는 문이 아니던가! 공북문은 오직 임금만이 나고 들 수 있었다. 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그 언제이고 국가의 문이 제 스스로 열렸던가? 다 무너지고 빗장만 남은 왕조의 문이라도 백성들이 열어야만 열렸다. 삼례역참에서 학진은 공북문을 백성들이 전녹두라고 부르는 사내가 열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여차하면 조정과 맞서겠으니 신임감사는 백성을 좇으라는 봉준의 뜻을 모를 리 없는 학진이었다.

봉준은 패서문에 마중 나오지 않고 객사에서 기다렸다. 그로써 호남창의군은 조선 전체에 맞서는 것임을 봉준은 드러내고 있었다. 학진은 봉준을 탓하지 않았다. 봉준은 봉준의 일이 있고 학진은 학진의 일이 있다. 서로의 일을 탓하면 산통은 깨지기 마련이다.

감영보다 객사는 격이 높았다. 객사에 전패(殿牌 :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로, ‘전(殿)’자를 새김)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향망궐배(向望闕拜 : 달을 보면서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림.)하는 곳이 객사였다. 객사는 객관이 아니라 왕조의 사직을 상징하고, 종사의 안위를 이루며,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곳이었다.

왕가의 종친인 듯 대갓에 옥관자며 한껏 위의를 차리고 흰 수염이 가지런한 선비가 꼿꼿이 내질렀다.

-이 보시오 순상, 어찌 적괴의 마중을 받는단 말이오. 순상이 그러고도 상감의 신하란 말이오.

예상치 못한 일이 아니었다. 학진이 말을 받았다.

-공의 말씀이 과연 합당하외다. 제 신하된 도리로서 위로는 성상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 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안돈치 못 하여 난이 났으니 어찌 죽음인들 달게 받지 않겠습니까. 허나 시세가 난망하니 그 죄는 차차 받기로 하고, 우선 임금께 배례부터 하여야겠소이다.

학진이 종친의 말을 받아주고 누그러뜨리는 인내를 보였다. 더구나 조정의 사신이든 부임하는 관장이든 객사의 전패에 배례부터 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가 아니던가. 예는 곧 권력이고 체제이며 왕조 이데올로기의 내면화였다. 객사는 객관이 아니었다. 지방 통치의 정점에 있는 건물이었다.

봉준을 시종하고 있던 송희옥이 봉준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 저자들이 섬기는 위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오. 입성하던 날로 객사를 혁파해야 했던 것 아니오.

- 저들의 하늘과 우리의 하늘이 다른 즉 잠시라도 저들의 하늘을 두는 것이 상책이오. 지금은 전라도 일원에서 힘을 더 기를 때라 보오. 외병이 상륙했다 하니 저들의 힘을 얻지 않고서는 전라도인들 지키기 어렵소이다.

- 과연 저들이 힘을 보탤까요.

- 모두 도륙할 수 없는 일, 원한이 깊어지면 세상은 이루어지 않는 법, 저들의 힘을 얻지 못 한다면 힘이라도 빼야 하지 않겠소.

2016 늦 가을~2017 이른 봄이었다. 혼용무도한 여제를 끌어내리기 위한 전주 촛불은 객사 거리에서 탔다. 초딩과 80 노장이 공감하고 공진했다. 록과 판소리가 여민동락하였다.

아뿔싸! 민주의 올드보이들과 여제의 환관들이 그대로 귀환하였다. 서울과 중앙에 향망궐배함이 어찌 옛일이기만 하겠는가? 서울 일극 집중, 국가 하도급 자치, 국회의원의 비서인 지방의원, 옛 왕조의 종친과 마찬가지인 민주토호들! 촛불은 해체되었다. 서울을 향하는 공북문은 열리지 않았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3. 한님들의 자기통치체제를 열다

주위를 물리치고 객사 동익헌에서 봉준과 학진은 마주앉았다. 봉준이 먼저 말하였다. 봉준은 일호의 망설임도 없이 학진의 관직명으로 예를 갖췄다. 그깢 호칭 따위 자질구레함으로 뜻을 도모치 못 함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순상께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학진은 봉준이 자신을 순상으로 부르자 봉준의 호칭을 망설였다. 조정에서 보아 장군도 두령도 아니고 다만 적괴였을 뿐이다. 학진이 봉준을 두령이나 장군으로 부른다면 장차 전주의 사대부들에게 위의가 서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은 이후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할 때에 학진에게나 봉준에게나 득이 될 일이 아니었다. 학진은 봉준의 자를 생각해냈다. 봉준은 군호였다. 봉준의 자는 명숙이었다. 사내는 중언부언하지 않았다. 사내는 청병과 왜병들이 상륙한 조정의 곤궁한 처지를 꿰고 있었다. 그 말은 힘을 합하자는 뜻이기도 했고, 달리 방법이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상대의 궁량을 헤아리려고 말을 돌려야 할 까닭이 봉준의 한마디로 사라졌다. 사내는 무겁고 깊게 곧바로 묻고 있었다.

- 호남의 인심이 야박하다. 명숙의 말이 본관을 핍박하는구려. 본관이 무엇을 할 수 있겠소. 그대들은 병장기를 가졌고 본관은 다만 더불어 활로를 열고자 할 뿐이다.

- 순상! 활로라 하셨소이까? 그 활로가 조정의 활로입니까? 백성의 활로입니까? 그 활로를 찾아 임금의 명을 기다리는 동안에 왜병이 먼저 남쪽과 서쪽 바다에 이를 것이오. 순상이 다만 조정의 명을 전하고자 한다면 객사인들 온전하지 못 할 것입니다.

- 내 이미 더불어 활로를 열자고 하였는데, 명숙이 내게 다짐을 받고자 하시오. 백성의 살고 죽음이 어찌 조정과 본관과 명숙에게 달렸겠는가? 내 비록 조정의 녹을 받으나 근본이 백성에게 있음을 아니 명숙은 본관을 의심치 말라. 그대들의 뜻을 좇아 함께 살 길을 열것이다. 이만하면 되었는가?

봉준이 답할 차례였다.

-순상께서 백성들의 살고 죽음이 오직 백성의 뜻에 달렸다 하니 조정의 명을 따라 초제(힘으로 쓸어버림)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알겠소이다. 제 이미 백성들과 말을 마쳤은 즉, 순상이 우리 뜻을 좇아 정법을 함께 펴시겠소.

-내 감사 집무실 선화당을 명숙에게 내주고 객사에 머물 것이오. 내 그대들과 화약(전주화약)하였노라고 조정에 장계를 올릴 것이오. 백성들을 향리로 보내 모내기를 하도록 하시오. 백성들이 땅을 잊지 못해 안달이 났을 것이오.

봉준은 감영보다도 격이 높은 객사를 감사 학진에게 내주어 왕조의 위엄을 지켜주었고, 자신은 전라감영(1부, 4목, 7도호부, 11군, 33현)을 맡아 민중 자치를 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관민상화(官民相和)의 이 합의는 세 발 솥처럼 어느 하나만 어긋나도 무너질 형국이었다. 관민상화의 화약이라지만 향리의 민중자치활동이 동학의 포접과 만나면서 동세변혁기에 개벽기관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임을 학진은 알고 있었다. 왜병과 조정의 대처에 따라 화약은 깨질 시기만을 염탐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세 발 솥은 깨졌고 1953년까지 '동북아60년국제전쟁'에서 조선인, 한국인 800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강주영(건축시공기술사·목수·전 교육부 대표 시민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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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4-06-1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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