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재 이항의 문학과 사상을 읽다
한국학호남진흥원, ‘일재집(一齋集)’과 ‘정강일기(定岡日記)’ 1.2 국역
한국학호남진흥원이 ‘일재집(一齋集, 국역 김상희, 해제 오보라)’을 펴냈다.
절의정신의 상징 공간이 무성서원이라면, 절의정신의 상징 인물은 일재 이항(一齋 李恒, 1499~1576)이다. ‘일재집’엔 한시 22수를 비롯, 서(書)와 잡저(雜著)로 구분된다. 그의 한시는 교유시(交遊詩)로 22수가 수록됐다. 김인후에게 써준 시가 3수이며, 신잠, 노진에게 써준 시가 2수, 송인수, 백광홍, 정지운 등에게 써준 시가 1수다.
서는 노진, 김인후, 기대승, 허엽, 남언기, 노수진, 백광홍, 남언경에세 보내는 것이며, 잡저는 ‘이기설(理氣說)’과 ‘자강재잠(自强齋箴)’, 유몽학, 김인후, 김영정 등에게 주는 글이 수록됐다.
이번 번역은 2023년한국학호남진흥원의 ‘호남국학진흥사업’ 중 ‘호남 문헌 국역 및 편찬’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대학자 일재 선생의 무게는 크다. 정읍출신 이항은 그가 살았던 태인현 뿐만 아니라 전라도를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그는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퇴계 이황이나 남명 조식에 못지 않는 학문적, 정치적 위상이 있는 인물로 ‘호남의 큰 스승(師表)’으로 추숭되어 왔다. 퇴계 이황은 그를 ‘호남 이학(理學)의 창(倡)’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또한, 그의 문집인 '일재집' 서문을 쓴 현석 박세채는 ‘몸소 밭 갈며 부모를 봉양하고 선조를 받들기를 매우 완비하게 되니 향당(鄕黨)이 변화되었다’며 그의 실천적인 지행합일(知行合一) 사상을 크게 높였다.
그는 김인후, 기대승, 신잠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며 학문과 실천유학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의 제자들은 이름난 인물들이 많다. 특히, 임진왜란 때 온 몸으로 나라의 국난을 극복한 문인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태인 출신 안의, 손홍록은 전주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 태조어진 등을 내장산으로 옮겨 지켰고,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나주 출신 건재 김천일, 웅치전투에 참가한 고부 출신 오봉 김제민, 남원에서 창의한 도탄 변사정, 용인전투에서 전사해 정읍 모충사(慕忠祠)에 배향된 백광언, 양산숙, 김후진, 김복억, 김대립, 소산복, 안창국, 이수일 등 임진왜란에 혁혁한 공을 세운 많은 이들이 그의 문인이라는 점이다. 무성서원에서 직선거리로 7km 남짓 떨어진 정읍시 북면 보림리 일원에는 일재 선생을 제향한 남고서원(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6호), 일재 이항 묘소와 묘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46호), 강학공간이었던 보림정사 터 등 관련 유적이 확인된다.
‘정강일기(定岡日記, 지은이 김주현, 국역 김성희, 장안영, 신용권, 해제 김연주)’는 정강 김주현이 1938년 5월부터 1948년 12월까지 10년 7개월 동안 기록했다.
‘작은 어머님[小母]의 병을 살피니 어제의 약이 효험이 있었던 듯하다. 또 가감양영탕(加減養榮湯) 두 첩을 더 드시게 했다. 마을 앞에 나오니 양복 입은 두세 명이 붉은색과 흰색 무늬가 섞인 긴 장대를 갖고 있었는데 길이가 반장(半丈)쯤 되었고 밭 사이에 세워 두었다. 옆 사람에게 물으니 ‘이들은 남포선로 측량원’이라 했다. 토지의 침입이 많아 주민 원망이 분분했다. 내가 ‘남포개항을 먼저 주창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본면 직원(本面吏)과 협의원(協議員) 등이 결의하여 출원했다’고 하였다. 나 혼자 마음으로 말하기를 ‘원망이 있으나 어쩔 것이냐’ 했다’
한적한 시골 풍경이다. 아침에 일어나 옆집에 사는 작은어머님을 살피니 어제 드린 약이 효험이 있었던지 조금 더 말끔해지신 듯하다. 나이가 들면 어른들은 당연히 기가 허해 지는 등 몸이 아플 수밖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배려하신 것인지 옆집이기는 하지만 조심스럽다. 그래도 어제 보다는 좋아 지셨으니 다행이랄까. 오늘은 또 가감양영탕 두 첩을 더 올렸다. 기허혈쇠(氣虛血衰)를 보한다는 가감양영탕·건지황(乾地黃)·당귀(當歸)·백작약(白芍藥)·오약(烏藥)·천궁(川芎) 등을 넣었을 것이다.
이는 1938년 6월 8일, 어느 유생의 일기에 적힌 내용이다. 전남 장흥군 용산면 관지리 ‘황새몰’. 기록을 남긴 이는 정강 김주현(定岡 金冑現, 1890~1960). 당시 마흔 아홉 살. 음력으로 6월이니 한창 더울 때다. 이처럼 시골의 한적한 경관과 제도적으로 뒷받침되는 개발을 적은 짧은 기록이지만, 이 일기를 통하여 당시의 시대상, 지역상, 생활상을 읽을 수 있다.
'정강일기'는 김주현의 나이 49세 생일날인 1938년 5월 23일(음력)부터 시작, 59세때인 1948년 12월 30일까지 기록이다. 양력으로 1938년 6월 20일부터 1949년 1월 28일까지이다. 모두 10책인데 처음 1책은 1938년 5월부터 그 이듬해 5월까지 1년간, 2책과 3책은 1년 2개월에서 1년 4개월간의 기록이고, 4책부터는 그해의 1월에서 12월까지 각각 1년간의 기록이다. 본문은 1면에 10행, 1행은 20자이며 작은글씨로 주(註)를 달았다. 모두 1,043면인데, 출타 등 특별한 경우 외에는 거의 거르지 않고 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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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4-06-04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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