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05월 20일 08시35분
섬유방직 공장에서 문화예술공간으로 재탄생한 교동미술관
교동미술관, 본관 2전시실과 뜻밖의 미술관에서 ‘유연한 공간: 연대의 힘’ 전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2024 박물관·미술관 주간'의 공식 프로그램 사업으로 이번 공모를 통해 각 지역의 박물관 및 미술관과 연계한 32개관, 25개 프로그램이 최종 선정됐다. 교동미술관은 4년 연속 전북 유일 박미주간 수행기관으로 사업에 참여하게 됐다.
섬유방직 공장에서 문화예술공간으로 재탄생한 교동미술관의 역사를 탐구하고, 예술을 통한 나눔의 가치를 실현하는 기획전시가 마련됐다.
‘유연한 공간 : 연대의 힘(Flexible Space : The Power of Solidarity)’은 과거 섬유방직공장에서 문화예술공간으로 재탄생한 교동미술관의 역사를 탐구하고, 예술을 통한 나눔의 가치를 실현하는 미술관의 동시대성과 의의를 고찰하는 연구의 일환으로 기획됐다.
교동미술관의 과거와 현재를 상징하고 연결하는 ‘재봉틀’은 전시장 곳곳에 배치되어 반세기의 시공간을 매개한다. 이는 한국 사회와 경제 발전의 주역임에도 가려져 있던 여공들을 비롯해 여성 노동자들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이 전시를 통해 역사적으로,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주변화된 타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여성들을 주목하고 다채로운 그들의 서사를 연결하고자 한다. 동시대 여성 예술가 3인의 젠더, 세대, 계층을 초월한 시선과 연대를 향한 고민을 공유하며, 나아가 예술의 범주를 확장해 ‘미술-영화-공연’의 다채로운 예술을 제안한다.
전시에 참여하는 고보연은 주로 설치 작품의 형태로 여성의 삶, 치유와 회복, 버려진 것의 재생 등을 주제로 다양한 설치 작업을 지속해오며, 작품의 메시지와 작가의 태도가 일치하는 예술적 실천을 이어가고 있다. 작가는 일상에서 버려진 폐기물을 재활용하고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며, 지난한 노동집약적 작업방식을 고수해 모든 작품을 수작업으로 시각화한다. 이러한 방식은 때때로 전자본주의적인 것처럼 보이며, 먼 과거에서부터 20세기까지 여성의 노동이 ‘소일거리’나 사적인 영역에 갇힌 노동으로 인식되어 온 역사를 방증한다. 동시대에 이르러 예술계에서도 소외되던 여성작가의 발굴이 점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고보연은 ‘여성적’으로 구분 지어져 온 노동을 예술적 실천과 연결 지음으로써, 사적인 영역에 머무른 채 배제되고 평가 절하된 여성의 노동을 공적인 영역, 특히 예술적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확장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경계를 허물고 여성적 글쓰기를 실현하는 고보연에게 예술은 사회적 발언의 창구이자 작가의 삶 그 자체이다. 그의 작업은 자칫 전통적인 여성의 삶에서 흔히 강조되는 임신, 출산, 육아와 같은 키워드를 상연하는 듯 보이지만, 이는 작가가 여성으로서 경험한 관계에 대한 기록(documentary) 혹은 일기를 쓰는 행위에 가깝다.
김영란의 '삶의 트로피'(2024) 시리즈는 돌아가신 부모님의 삶을 소환하여 그들이 지나간 시공간의 흔적인 물건을 채집한 결과물이다. 대부분 그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던 생활용품이나, 고이 간직한 물건, 애정을 들여 수집한 물건들이다. 이 물건들은 체온을 나누던 ‘떠난 이’의 표상일 것이며, 김영란은 그것을 저릿한 감각과 연결한다. 우리의 오랜 미풍양속 중 관혼상제가 있다. 관례는 성인식, 혼례는 혼인식, 상례는 장례식, 제례는 죽은 이의 넋을 기리고 위로하는 제사를 뜻한다. “이 땅에 발 딛고 살던 우리네 어머니들은 ‘이름 없는 풀꽃’과 같은 삶을 살았다”는 작가의 말을 미루어 짐작건대, 그들에게 돌려주고 싶은 것은 ‘이름’과 ‘존엄’, 그리고 트로피가 의미하는 것처럼‘보상’과 ‘영광’일 터이다. 어머니가 쓰던 물건들은 형체 그대로 얇은 화선지에 의해 감싸지고 굳어져 형을 유지하되,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일정 부분 무게는 줄어든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란이 선택한 캐스팅 기법은 떠난 영혼에 바치는 제례 의식과도 같다.
'삶의 트로피'(2024) 시리즈가 개인적 서사에서 비롯된 의식이라면, (2023)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서 여성들과 그들의 지워진 이름을 ‘호명’하고 있다. 많은 시간과 애정을 들이는 과정에서 각각의 이름들이 새겨진다. 모시 한 필에 새겨진 이름들은 지워지고 잊혀진 여성들의 존재를 되새기며 생략된 세월을 가늠케 한다. 어쩌면 평생 자신의 이름 대신 어떤 역할로 불리는 경험을 사명 또는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서글픈 마음으로 살았을 여성들의 넋을 위로한다.
조한나는 '퀸의 뜨개질'(2023)의 감독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과 다큐멘터리를 전공했다. '퀸의 뜨개질'은 작년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 단편경쟁 부문 ‘대상’을 받은 수상작이며 제16회 전북여성영화제에 초청되어 소개된 바 있다. 36min분량의 다큐멘터리로 15년 전 할머니 ‘춘자’로부터 전수받은 뜨개질을 소재 삼아, ‘만다라 매드니스’를 제작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영화 제작 기간 2년 중 6개월을 꼬박 만다라를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인도불교에서 만다라는 깨달음의 경지를 도형화한 것으로 명상과 수련을 의미하며 심리학적 관점에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외부의 현실 세계 및 경험을 연결하는 수단이 된다. 한나는 뜨개질을 통해 지나간 시간을 유영하며 기억의 편린을 수집하고 해체한다. 자신의 것과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구분하고 사회의 정상성의 개념에 반문한다. '제 2의성'(1949)의 저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이 ‘만들어진 존재’로 명명한다. 이 말은 사회적 구조의 견고하게 자리 잡은 가부장제에 종속된 여성을 예로 들 수 있다.
‘춘자’는 남성의 절대적 타자의 위치를 체화하고 내면화하여 돌봄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적인 영역에서 살아온 인물로 대표된다. 반면 ‘한나’는 발화하는 주체로 다양성의 삶, 정상성의 전복,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변적 속성을 대표한다. 스스로 자신의 삶과 존재 방식을 침잠하고 발화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한나의 선언적 외침 ‘can be anyone’은 여성-남성의 이분법 젠더 구분을 넘어 트렌스젠더, 성적지향을 포함한 ‘누구나anyone’를 포용한다. 연대는 ‘나’와 ‘타자’의 관계성을 전제로만 이해될 수 있는 개념이고 행위이다. 작가와 작가, 작품과 관람객, 그리고 예술적 장르와 장르 간 경계를 허물고 또 확장하기를 시도하여, 이 전시의 주요한 키워드인 ‘연대’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나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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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4-05-21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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