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04월 14일 15시02분
전주 기린미술관, 오광해 초대 개인전 '묵묵현답(墨墨賢答)'
전시엔 그만의 '소나무'가 모습을 드러낸다. 작가가 처음 소나무를 그리게 된 것은 오지의 화전을 일구던 외딴집에서 한 겨울을 날 때였다. 밤에는 전기가 없어 촛불을 켜고 책을 읽었는데 문득 벽과 천장을 보니 오래된 한지에 얼룩이 어렸다. 그 얼룩을 감추고 싶어 촛불 5개를 켜고 먹을 찍어 삽작거리를 오가며 보았던 소나무를 얼룩을 따라 밤새 그리다 보니 벽에서 천장을 잇게 됏고 소나무 가지 사이로는 아침 해가 떠올랐다. 이후 작가는 먹물이라는 적절한 재료를 찾아 그림을 그리게 됐고 소나무 화가라는 소리도 듣게 됐다.
하지만 요즘은 소나무를 중점에 두고 그리지 않는다. 산천에 널린 잘생긴 소나무를 많이 그려야 한다면 그런 소나무 화가도 많고 사진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고도의 기술로 완벽하게 재현 해 내는 것은 AI가 할 일이지 예술 영역에서 할 일은 아니다.작가는 소나무를 오래 사귀었던 그 마음을 수묵이라는 낡은 재료로 표현한다고 해서 실패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랜 기간 소나무를 그려온 작가는 다양한 재료를 통해 소나무의 한결 같은 강인함을 담아낸다. 오광해가 바라보는 소나무는 바람과 거친 환경에서도 깊게 뿌리내리고 있으며 자신의 몸을 휘면서도 꿋꿋하게 이겨낸다. 소나무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그리고 바람을 이겨내는 소나무의 강인함을 담아내고 있다. 여기서 소나무는 바람에 꺾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지키면서 그것에 유연하게 적응하고 있다. 이처럼 작가는 단순히 소나무를 그리는 것이 아닌, 그 안에 담겨져 있는 가치들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한 미술평론가는 “소나무를 흐르는 바람과 안개, 은은한 향기까지도 놓치지 않았다”고 했다.
동양화의 구분이나 차별화 할 때는 물론 동양화를 그리는 이들도 ‘관념’을 주의하고 경계 한다. 관념을 제거한 풍경을 진경이라 부르지만 풍경화와 그림을 그리는 재료의 차이 뿐 부연 설명이 없다면 변별성은 떨어진다. 사생보단 사의의 가치를 평가하는 동양이 관념을 빼고 지금까지 집대성한 동양화의 진가를 표현 하기는 어려울 터이다.
작가는 산수화를 처음 그릴 때는 본 적이 없는 뾰족한 높은 산을 즐겨 그렸다. 동양화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이상을 기암괴석과 골계미가 있는 높은 산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던 듯하다. 나중에 중국의 산을 보고 작가가 그렸던 산이 실제로 존재 했었다는 것을 알았다. 혹자는 중국 산을 여행하고 그린 것이냐고 묻기도 하지만 떠올랐던 공간의 일치일 뿐 장소나 기법 보단 심상의 효과적 표현이 더 중요하다. 목단의 형상을 빌어 배산임수 좌청룡 우백호를 그린 산수 ‘모란촌’도 현실에 없는 지형을 형상화 했다.
작가는 "한 가지 전시 주제의 일관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많은 기간이 흘렀다면 다양한 결과가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에서다. 한국행위예술가협회 작업에 참가하는 것도 한국화의 다소 고답적인 시각의 고착화를 피하기 위한 일환일 수 있다"고 했다. 이어 "하지만 금맥을 발견하듯 새로운 재료와 기법의 발견과 발굴에 혈안이 되거나 현대미술에 멱살을 잡히고 싶지는 않다. 그동안 열린 선택으로 벼려왔던 작업의 가치를 믿는다"고 했다./이종근기자
지면 : 2024-04-15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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