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03월 25일 08시27분
존재를 향한 응시
[책마주보기] 애니 프루의 ‘시핑뉴스’ (문미숙)
퓰리처상 수상작이기도 한 “시핑뉴스”는 절망의 바닥을 경험한 코일이라는 남성이 기적처럼 삶의 조타수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장편 서사이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구박 덩이 어린 시절을 지나 청소년기에는 미소와 침묵으로 고통을 감추는 데 익숙해진 코일은 성인이 되어서도 감정을 배제하는 법을 터득하며 산다. 부모님은 동반 자살했고, 아내는 정부와 도망하던 중 죽음을 맞이한다. 게다가 코일은 실직상태에서 아내가 팔아넘긴 두 딸을 찾아야 하는 현실적 고통에 직면해 있다.
실패의 나락에서 더는 일어설 힘이 없는 그에게 찾아온 애그니스 고모는 아버지의 유해를 들고 고향인 뉴펀들랜드의 초록집으로 가자고 한다. 고모에게 고향은 친오빠의 성폭행과 상처로 얼룩진 곳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세상의 풍파 속에서 과거와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단단하게 응시한다. 특히 소설이 갖는 공간특성은 인물과 사건을 압도시키는 서사적 힘과 연관된다. 만(灣)을 끼고 있는 뉴펀들랜드는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코일 가(家)의 치욕스러운 과거가 깃든 늑대의 울음 같은 곳이다. 마을 사람들이 코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가 상처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을 긍정해 가는 과정은 혼자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가능해진다는 평범한 진리가 시간을 통과하면서 펼쳐지는 것이다.
이 책은 장마다 매듭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상처가 아물어가는 시간과 이를 보듬어줄 공간이 매듭으로 상징된다. 매듭 속에도 바람이 머무는 것을 볼 수 있는 작가의 시선은 새로운 매듭의 탄생을 예고한다. 그러나 결과는 여전히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결과를 만들어가는 몫이 삶에 대한 희망과 긍정의 힘이라는 메시지가 행간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코일에게 새로운 시작은 모든 것을 지우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첫 번째 부인 패틀의 부정과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단단한 껍질 속의 자신이다. 그럼에도 미래의 ‘전조’에 전율하기도 하는 것이 삶이다. 과거를 부정하고 새로운 삶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존재로서 인정해 주는 일이 새로운 현재의 시작이듯 데이비드 흄은 “반복되고 있는 대상 안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며 반복을 응시하는 정신 안에서 무엇인가 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반복을 응시하는 정신만이 일상으로 매몰된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으로 작동한다. 작가는 코일을 통해 희망을 반복해서 응시한다.
문미숙 작가는
브런치작가, 문학으로 철학읽기 동인
지면 : 2024-03-26 14면
http://sjbnews.com/81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