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03월 14일 13시30분
[금요수필] 민들레꽃 지고
소선녀
그날 이후 그 단발머리 여자애는 아침마다 할아버지를 만났다.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상투 튼 머리에 갓을 쓰고 도포까지 차려입으신 모습이었다. 언제나 정갈하신 태도로 마치 어른을 대하듯 그 아이를 예우해 주셨다. 어떤 날은 녹슨 자전거 손잡이에 노란 민들레꽃이 꽂혀 있기도 했다. 그런데 그리 편안한 시간이 아니었다고 기억된다. 할아버지 자전거 덕분에 흰 운동화는 깨끗했으며, 버스를 놓치는 일도 없게 되었는데 왜 그랬을까? 울퉁불퉁한 산길에 채여 엉덩이가 아파도 아, 소리조차 내기 어려운, 그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까.
버스 시간이 여유가 있는 날은 그 여자애만 뒤에 태우고 자전거를 끌고 가시기도 했는데 ‘잘 잤소’ 하는 인사말 외에는 거의 말이 없으셨던 할아버지. 지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른 아침에 짙은 소나무 냄새가 그 여자애 가슴을 갑갑하게 했다. 시간이 있으니 혼자 걸어가겠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시곤 그냥 되돌아가시던 할아버지. 혼자 가려고 일부러 서둘러서 나오거나 큰길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전거를 끌고 나와 계셨다. 비 오는 날에도. 한번은 아빠와 함께 버스를 타러 가게 되었다. 산길에서 그 여자애를 기다리시던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괜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두 분은 서로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셨다. 아빠에게 들은 바로는 그분이 일생을 유교에 심취하셨으며, 그 지역에서 덕망이 높으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달여 지났을까. 그날 할아버지는 자전거를 가져오지 않고 그냥 걸어오셨다. 한참 동안 그 여자애를 가만히 들여다보시더니 아침마다 자기가 오는 것이 싫으냐고 물으셨다. 요즘처럼 자신이 행복한 날은 없었으며, 아침마다 그 애를 만나는 것이 큰 기쁨이었노라고. 다만 그 애가 부담스럽다면 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막상 좋아했던 남학생에게서도 사랑한다는 글귀가 들어있는 연애편지를 받으면, 묘하게 싫어지던 그 여린 시절, 그 여자애는 할아버지의 감정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뭐라고 대답했던가. 그날 이후로 다시는 할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이제는 지나간 세월의 한 갈피에 묻혀버린 옛이야기가 되었지만, 지금도 산길을 걷고 있으면 달달달달, 자전거 굴러오는 소리 들린다.
소선녀 수필가는
2002 '시와 산문' 등단
작품집 '봄이면 밑둥에서 새순을 낸다', '푸나무의 노래', '두베가 내게 올 무렵'
지평선문학상, 하림예술상, 산호문학상, 신무문학상 수상
지면 : 2024-03-15 14면
http://sjbnews.com/809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