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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02월 01일 10시50분

[금요수필]매화

소선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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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일세, 자네! 어떻게 지내는가, 궁금하이. 무에 그리 바쁜지,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하네그려. 섬진강가로 매화를 보러갔다네. 해마다 이때쯤이면 엉덩이가 들썩거리지 뭔가. 그 환하고 정갈한 미소가 눈에 밟혀서 말이네. 그런데 참 이상하이. 아름다운 것을 보면 왜, 서러움이 차오르는 걸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내 처지가 덧놓이네그려. 저런 꽃 같은 시절이 내게도 있었던가. 너무도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으이. 초목들처럼 봄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새순으로 다시 나와 봤으면. 그러면 엄벙덤벙 지내버린 세월을 다시 고쳐볼 수 있지 않겠나. 부질없는 소리네. 영영 가버린 내 봄이네. 그래서인지 무작정 남의 봄이 좋네그려. 그래서 봄을 만나러 나섰네. 가다가 지리산 산자락에서 산수유를 보고, 섬진강가로 한 바퀴 돌면서 매화를 만나보려고 했지. 그런데 여느 해보다 꽃이 이르다더니, 병아리처럼 고운 산수유꽃은 빛이 바래버렸더군. 이런, 섬진강가의 매화는 다 지고 없네그려. 꽃구름이 내려앉은 듯 눈부시던 산비탈은, 듬성듬성 남아있는 시든 꽃으로 추레한 모습이군.

꽃잎을 죄다 놓쳐버리고 꽃받침만 남은 것을 훑어보다가, 하나 따서 들여다보았네. 제 힘을 다한 듯 늘어져 누워버린 수술을 젖혀보니 오호라, 벌써 쌀알만 한 매실이 들어있구먼. 입에 넣고 씹어보니 아직 밍밍한 맛이지만, 목메네그려. 시작이 어여뻐서 말일세. 저 꽃받침마다 시나브로 지 과실을 키우고 있지 않은가. 사실, 알량한 내 열매에 마음 쓰이네그려. 단맛을 들일 시간도 허송 지나쳐와 버리고는, 이제 와서 어쩌자는 건가. 마음보다 몸이 더 날랬던 시절이 가고, 마음이 몸을 끌고 다니는 시절이 온 것을. 몸이 못 따라 나설 때가 더 많은 가을의 끝자락에 와 있지 않은가.

얼마 전에 심리검사를 받아 보았다네. ‘당신 꿈은 무엇입니까’ 라는 문항 앞에서 그만 멍해버렸지 뭔가. 그저 한참을 앉아 있었네. 어느새 나의 바램, 내 기도는 자식을 향해 있더구먼. 나를 위한 꿈은 아무리 뒤져봐도 없더군. 그저 남은 세월 세파에 휘둘리지 않고, 조용히 살다 가면 되겠다 싶은데. 어떤가, 자넨?

도로는 한산하고, 매화는 없고, 시간이 남았다네. 화개장터나 돌아보자고 다리를 건넜네. 화개천이 너무 맑아서 바닥이 훤히 보이데. 어, 그런데 저건 뭐냐. 물빛을 닮아 쉽게 눈에 띄지 않았지만, 자세히 바라보니 팔뚝만 한 물고기가 떼를 이루며 올라오고 있지 않은가. 얼마나 많은지 강폭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네그려. 질서정연하게 쉬지 않고 움직이는 저 행렬을 좀 보게!

온 세상이 정지되어 버리더군. ‘산란을 하려고 바다에서 올라온 향어라우. 꼭 이때쯤이면 올라오지.’ 옆에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분이 일러주셨네. 아무도 돌다리 아래로 내려가질 않더구먼. 아무도 뜰채를 생각하지 않더구먼. 혼신을 다하는 모습이, 머리에 기억되지 않고 가슴에 박힌 탓이네. 가슴으로 받은 것은 같은 편이 되는 것이니까. 그 먼 길을 왔는데도 지치지 않고, 숭고한 기운이 어려있네. 응원하는 심정으로 어미가 어미를 보네그려.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누워서도 그 광경이 떠올랐네. 누구인들 인생무상을 비켜갈 수 있겠는가. 질고에 고꾸라져도 봤고 억장이 무너져도 봤지. 쉽지 않은 인생살이였네. 육십여 번 태양을 돌면서 노상 어지러웠구려. 모로 돌아눕다가 흘러내린 눈물이 베갯잇을 적시더구먼. 향어인지 나인지 속으로 말해줬네. 괜찮으이. 예까지 달려오느라 애썼네. 이제 그만 뒤돌아보고 앞을 보게나. 겨울은 봄을 열어주는 통로 아닌가.





소선녀 수필가는



2002 시와 산문 등단

작품집 '봄이면 밑둥에서 새순을 낸다', '푸나무의 노래', '두베가 내게 올 무렵'

지평선문학상, 하림예술상, 산호문학상, 신무문학상 수상





지면 : 2024-02-02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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