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4년 01월 31일 14시56분
[문화로 이야기꽃]미리 써두는 이력서
시냇가에서 공자가 한 말이다. 변함없이 흘러가는 자연의 이치를 말한다. 담긴 뜻이야 여러 가지 상황에 맞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이 세상에 흐르는 것 가운데 가장 허망한 것이 시간의 흐름 아닐까. 새해를 맞은 지가 얼마 되지 않은 느낌인데도 벌써 한참을 지나왔다. 흘러간 시간이 남기고 간 것은 아쉬움과 그리움이다. 아차 하는 순간에 한 해가 가고 10년이 한 묶음씩 훌쩍훌쩍 스쳐간다. 나이 숫자와 속도가 비례한다는 우스개소리가 있는데, 젊은 시절에는 이를 실감하지 못한다.
교양학부 학생들에게 수업할 때 첫 과제로 ‘미리 쓰는 이력서’를 제출하게 했었다.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할 때 쓰는 취업용 이력서가 아니라 이제 갓 자유의지를 펼칠 무렵에 인생 이력서를 미리 쓰는 것이다. 인생을 설계하는 계획서를 쓰라면 따분하고 부담이 되는데, 어느 정도 인생길을 지나 온 뒤에 생각을 정리해 내가 한 일들을 정리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이력서에 쓴 일들은 인생계획이 되고, 미리미리 마음에 담아 준비하게 된다. 재미있게 이력서를 미리 써보는 느낌을 귀하게 여기는 학생은 꿈을 펼치듯 또는 인생설계도를 그리듯 구체적으로 경력을 미리 적어낸다. 그리고 한 학기가 지날 무렵 마지막 과제를 낸다. 학기 초에 작성했던 이력서를 수정하도록 한다. 첫 학기가 끝날 무렵 인생길을 알 듯 모를듯 한 상태에서 수정해 제출해야 할 이 과제는 받지 않는다. 두고두고 자신이 수정하면서 관리하라고 한다.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데서 걱정이 생긴다(人無遠慮 必有近憂)”(논어 위령공 11). 먼 앞날을 계획하지 않고 가까운 일만 생각하면 미래 모습이나 준비 활동을 놓치게 된다. 그러면 목전의 이해관계나 즐거움만 먼저 생각하게 되니 나중에 곧 후회하게 된다. 그렇지만 시간흐름 위에서 만난 것들을 잘 이뤄내는 귀한 삶을 지나온다면 그 궤적을 꿰어낸 구슬이 보일 것이다.
공자는 자기 이력서를 10년 단위로 소개한바 있다. 이것은 실력, 경험, 이력을 모두 아우르는 인생력이다.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志學). 30세에 학문성과를 거둬 우뚝 섰다(而立). 40에 세상에 유혹받지 않고(不惑), 50에 하늘의 뜻을 알고(知天命), 60세에는 모든 말을 받아들일 도량을 갖춰 듣기에 편했다(耳順). 70에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모두 정당성을 갖게 되었다(논어 위정 4).
이에 대해 “공자 연보는 후대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결심이 되었다”고 평하는 사상가도 있었다. 실제로 이 같은 수준에 이르기는 턱없이 부족한 보통사람들일지라도, 그 기준선을 바탕으로 노력을 하게 된다면 마음가짐의 가치는 클 것이다. 이렇게 살다보면 70 노년에 이르면 모든 것이 다 옳게 이루어 져야 정답이다.
세월을 보내며 만나는 사람들이 곧 이력서일 수가 있다. 어느 공간, 어느 시간에 만나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지난 뒤에 되새겨 보면 또 다른 이력서였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三人行 必有我師), 그 좋은 점을 택하여 (澤其善者)따르고 좋지 않은 점은 고친다”(논어 술이 21).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사람은 큰일이 아니면 버리지 말라”(舊無大故 則不棄)(논어 미자 10).
살아오면서 맺은 관계, 함께 고뇌하고 쌓아 온 신의를 쉽사리 저버리지 말라는 뜻이다. 흔히 말하듯 함께해 온 세월이 얼마인데 함부로 버리고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 함꼐 해 온 일, 시간, 공간을 대할 때 마다 곁들어 생각 날 텐데 말이다. 흔히 이력서에 일한 직장이나 직책을 즐겨 기록하지만, 세월이 흐른 뒤까지 남는 것은 함께 일한 사람이다.
”뒤에 태어난 후배들은 두렵다(後生可畏). 미래의 후배들이 지금의 나 보다 못할 것이라고 어찌 속단할 수 있겠냐“(논어 자한 22)
이렇듯이 오래 사귄 동료, 우연히라도 만난 사람들, 선후배의 삶도 내 이력서에서는 귀하게 여겨진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하지 않겠는가. 눈앞에 보일 때만 잘하고, 헤어지면 그만인 삶이 아니다. 설사 그렇게 얄팍하게 살더라도 삶의 어느 언저리에서는 만나게 되는 것이 긴 인생아닌가.
시간대별로 흐름을 적어 내려가는 이력들에 남들과 함께 한 몇 가지를 덧붙여야 한다. 가까운 사람들의 삶이 남긴 궤적, 가까운 인간들의 횡적인 삶의 모습을 자기에 덧붙여 볼만하다. 인생길에서 만난 경력이 모두 다 스승이다.
여기에 요즘 젊은이들이 강조하는 자기방식, 자기공간, 자기 정의를 소중하게 품어야 한다. 삶에 대한 스토리 못지 않게 중요한 내러티브다. 일에 관한 경력말고 즐거운 이력서(樂歷書)나 피할 수 없는 슬픈이력서(黑歷書)도 만들어 두고 인생을 완성시켜야할 것 아닌가. /이흥재(한국지역사회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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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4-02-01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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