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4년 01월 24일 16시25분
이야기가 없는 길은 쓸쓸하다
'지리산에 사는 스님
절간 구석에
배추농사를 지었습니다
세 고랑은 사람의 것이고
한걸음 떨어진 작은 고랑은
손님의 것이랍니다
아침마다 찾아오는
배추벌레님을 이사시키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답니다
속이 채워지기 전부터
김장배추를 같이 먹고 산답니다
고적한 산사에
참 귀한 손님이라고 합니다('손님맞이' 전문)'
'비사벌에는 달 냄새가 난다(지은이 김현조 ,펴낸 곳 현대시학)'는 양재, 영등포구청, 신당 등 서울 지하철역 게시대에 게첨된 '손님맞이' 등 65편의 작품이 실린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내가 지은 시를 이야기 詩라고 이름 지었다”고 말한다.
인류의 오랜 역사가 숨 쉬고 있는 풍경, 그리고 잊고 싶은 안타까운 아픈 역사 등도 보듬고 있다. 세월의 덮개가 화석이 된 것인가. 화석이 시가 된 것인가.“이야기가 없는 길은 쓸쓸하다('비사벌초사에는 달 냄새가 난다')”는 그의 말처럼 삶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남긴다. 시인이 독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삶의 고통과 환희와 성찰에 관한 이야기이다. 거기에는 삶의 숙명적 본질을 긍정하며 생명을 연민하고 자본주의에 침윤된 현대적 삶의 실상과 세상의 부조리와 비리를 고발하고 생태주의와 공동의 선(善)을 지향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고명수 시인(전 동원대 교수)은 "시인은 풍부한 감성과 섬세한 감각을 바탕으로 다양한 이미지를 조형해내는 탁월한 이미지스트 시인이다. 특히 변화하는 계절의 정서를 그려내는 데 능숙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들이 보여주는 이미지 조형은 산뜻하면서도 깔끔한 멋이 있다. 이러한 역량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진 것은 아닌 듯하다. 오랜 절차탁마의 시간이 있었으리라"고 했다.
시인은 "봄을 위해 창문을 열어두어도 봄은 쉬이 오지 않았다. 수채화를 보면서 두근거렸던 詩, 첫서리 내린 아침을 늦게 알아채도 허물이 되지 않는 이야기가 시로 공유되어지길 바랐다. 내가 지은 시를 이야기 詩라고 이름 지었다"고 했다.
시인은 정읍 출신으로 1991년 '문학세계'로 등단했다. 저서로 시집 '사막풀', '당나귀를 만난 목화밭', 논저 '고려인의 노래', '고려인 이주사', 번역서 '이슬람의 현자 나스레진' 등을 펴냈다. 전북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사)전주문인협회 회장, '금요시담'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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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4-01-26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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