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화(梅花)는 지역마다 이름이 있다. 구례 화엄사의 흑매, 강릉 율곡매, 순천 선암매, 백양 고불매, 그리고 고창을 대표하는 매화는 높고 높은 고매(高梅)이다.
매화는 순천 선암사 선암매(천연기념물 제488호)와 강릉 오죽헌 율곡매(천연기념물 제484호), 장성 백양사 고불매(천연기념물 제486호)는 물론이거니와 통도사 지장매와 화엄사 화엄매, 고창 도암서원(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7호) 홍매(高梅)도 빼놓을 수 없다.
나무들이 잎을 틔우기 훨씬 전, 가지 끝에서 먼저 붉은 꽃망울을 밀어 올리는 것들이 있다. 그 작고 선명한 빛깔이 서원 돌담 위로 내려앉는 풍경은, 보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조용히 붙들고는 한다.
이제까지 본 매화나무는 기껏해야 어른 종아리 굵기였는데 역시 오래된 아름드리 매화나무는 씨름선수 몸통만큼 그 느낌 자체가 달랐다.
그리고, 그 향에 취한 수 천마리의 벌떼들이 마치 큰 스피커를 틀어 놓은 것처럼 소리 내며 부지런히 꿀을 모으고 있었다.
고창군 공음면 칠암리의 한 마을 안쪽, 오래된 서원 마당에 홍매화가 피어났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이 나무는 백매화보다 먼저 꽃을 터뜨리며, 아직 꽃망울만 맺힌 지금이 오히려 기대감을 고조시키는 시기다.
서원에서 한참을 있었다. 양지바른 서원 툇마루에 앉아 따듯한 햇살과 매향, 벌들의 날개짓 소리, 소나무숲과 대나무 숲이 이는 소리를 듣고 충효(忠孝)의 기를 듬뿍 담아 채웠다.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7호로 지정된 이 공간은 단순한 봄꽃 명소가 아니다.
도암서원(道巖書院)에서 '도암'은 한자로 道(길 도), 巖(바위 암)을 쓴다. 서원이 위치한 공음면 칠암리 일대에 있는 '도암(道巖)'이라는 바위에서 유래한다.
또, '길 도(道)' 자는 유교의 도리(도학)를 의미하고, '바위 암(巖)' 자는 굳건한 바위를 의미한다. 즉, '도학(道學)을 굳건히 지키는 바위' 또는 '도학의 기틀이 바위처럼 단단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서원은 조선 전기 유학자 김질(金質, 1496~1555)과 그의 증손 김경철, 아우 김익철을 배향, 창건 이후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마을과 함께 숨 쉬어온 공간으로, 오늘날에도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서원의 중심 인물인 김질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효행으로 이름을 남겼다. 김질은 안동 김씨로 호는 영모당(永慕堂)이다. 서원 강당에 영모당 현액이 걸린 연유다.
안동김씨 익원공파 시조는 상락부원군으로 조선 개국공신인 익원공(翼元公) 김사형(金士衡)이다. 그는 고창 입향조인 김사형의 현손 김을만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찬의(贊儀)를 지낸 김복중(金福重)이다.
세종조에 발간한 '삼강행실도'의 후속 증보판격인 광해군시 간행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효행편에 '김질부토(金質負土)'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을 만큼 조선의 충효교과서에 실린 대표 효자였다.
'진사 김질은 무장현 사람이다. 아비상을 당하여 애통하기를 법도에 지나치게 하고, 훍을 져다 봉분을 짓고 손수 제수를 장만하여 시묘살이 삼년을 하다. 어미의 종기를 걱정하여 입으로 빨아내고 하늘을 향해 큰소리로 기도하니 즉시 좋아지다. 어미상을 당하여 죽만 먹고 시묘하느라 삼년동안 집에 가지 않았다. 명종때 정문을 내렸다'
그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복한 이야기와 김인후, 기대승, 양응정 등 호남 거유들과 교유했고, 그들은 김질을 호남제일효자로 칭송했다.
모친상 시묘시 겨울 밤에 주위에는 한 길이 넘는 눈이 내렸으나, 하늘이 도와서 여막 둘레에만 내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생전에 좋아했던 꿩고기를 매년 제사상에 올렸는데, 어느 해 꿩고기를 구하지 못해 통탄하자 꿩이 스스로 부엌으로 날아들었다는 일화도 전해온다.
김질은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상과 조부모의 상 등 12년간을 시묘살이를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전에 꿩고기를 몹시 좋아했기에 그는 매년 12월 제삿날에는 짚신을 삼아 그곳에서 8㎞나 되는 안자시장(안진머리장,현 해리시장:고창군 해리면 소재)에 가서 짚신을 팔아 꿩을 사서 제물로 쓰곤 했다.
어느 해 눈이 많이 내려 시장이 서지 않아 제물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는 크게 걱정하면서 그의 불효로 인하여 하늘이 내린 벌로 알고 제삿날을 맞이하였다. 그런데 눈이 많이 내린 그날 석양 무렵에 갑자기 꿩 한 마리가 부엌으로 날아 들어와 벽에 부딪쳐 떨어졌다.
김질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그 꿩으로 제물을 삼아 제사를 모셨다. 그 다음 해에도 짚신을 등에 지고 눈길을 헤쳐 제물을 구하기 위해 안자시장에 가는 도중 때마침 무장 원님이 그곳을 행차하다가 김질의 모습을 보고 이 추운 날씨에 무엇 하러 가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원님은 김질의 효성이 지극함을 극찬하고는 그를 위해 개가리에 장을 세워 주었고, 김질은 평생 동안 눈길에 시장을 보러 가는 고생을 덜게 됐다.
무장읍성 객사 지형이 풍수상 뱀머리 사두혈이므로 사람이 모이기 어렵다고 해서 기러기떼가 모이듯 사람이 모여들 터인 해리 안진(雁陣)머리장을 열었다고 한다.
당시 무장현 치소에는 시장이 없었고 오늘날 해리면 안산에 안진머리장이 섰기에, 눈길에 제수를 장만하러 먼길을 왕복한다는 김질의 효행을 들은 무장현감이 감동, 특별히 그의 마을 근처 개가리와 갑촌사 이에 열어준 시장이 개갑장이다. 이는 개갑(介甲)마을에서 유래됐다. 과거 무장현과 법성포를 잇는 번창한 우시장이었다.
조선 중기 무장고을과 법성창을 잇는 중간 지점의 '개갑(介甲)마을'에서 장이 서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 '개개비 장터'라고 했다. 근대엔 소금과 수산물이 주거래 품목이 되면서 질마재, 선운포, 상포 등을 배후에 둔 알뫼장이 한때 번창했다가 소멸했다.
한창 번창하던 개갑장터(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1호)가 훗날 주변의 석교포와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인 무장기포를 준비하는 인적ㆍ물적 자원을 조달한 기지역할을 하게 됐다.
천주교 신유박해 당시 이곳에서 최초 순교한 복자 최여겸 마티아의 순교유적지이기도 하다.
'도암사건립사적'에 의하면 김질은 중국 명나라까지도 알아주던 효자라고 한다. 1546년 명나라 가정제가 직접 효자 정려를 하사했다. 이른바 ‘가정병오 천조정려’로 불리는 이 정려는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외국 황제의 공식 인정이었다. 서원 경내엔 강당 역할을 하는 영모당, 효자 정려각, 녹권함을 보관하는 봉안각, 그리고 도암사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봉안각의 녹권함과 하마비는 고창 지역 내에서도 유일한 유물로, 유산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는다.
도암서원이 봄마다 주목받는 이유는 경내에 피어나는 홍매화 때문이다. 백매화보다 일찍 꽃망울을 터뜨리는 홍매화는 아직 잎 한 장 없는 가지 위에서 붉은 빛을 발하며, 고즈넉한 서원 돌담과 어우러져 깊은 인상을 남긴다.
현재 꽃망울이 맺힌 시기로, 개화가 본격화되면 담장 너머로 붉은 꽃이 넘쳐흐르는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고창지역에서 탐매가들이 첫번째로 꼽는 도암서원 홍매가 한바탕 웃기시작하면 갑촌마을 어귀까지 매향이 진동한다. 매향에 이끌려 도암서원 외삼문에 들어서면, 여섯가지 사람의 기본 도리를 다하리라 다짐하는 계율(자계육잠, 自戒六箴)을 스스로 짓고 실천, 충효의 귀감이 된 영모당 김질의 그윽한 사람 향기에 다시 머리가 숙여진다.
퇴계 이황 등 수 많은 선비들이 매화를 아끼고 많은 애찬시를 남긴 것은 눈 속에서도 피어나는 매화의 고결한 성품과 선비다운 향기를 닮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350여년된 도암사 홍매는 꽃잎이 여러 겹인 만첩홍매(萬疊紅梅)로, 지금 만개 멀리서도 환하고 향기가 진동하고 있다. 나무 등걸과 수형도 단정하고 연분홍 꽃밥은 화사하기만 하다.
온갖 풍상을 다 겪고도 맑게 피어나, 세상을 밝히고 향기롭게 하고 싶은 도암홍매의 환한 미소와 그윽한 향기를 닮고 싶은 봄같쟎은 봄날이다. 매화의 고결한 매력과 알싸하면서도 향기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윽한 향이 은은하게 퍼지면서 암향부동(暗香浮動) , 이내 심금을 울린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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