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백 번의 봄을 담는 그릇, 춘향제 아카이빙

흩어진 시간의 조각을 모아 남원의 다음 100년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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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의 유리 진열장 너머를 가만히 응시하다 보면, 유물 그 자체보다 그것을 어루만졌을 누군가의 체온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지층 속에서 찾아낸 작은 파편 하나가 때로는 두꺼운 역사책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계절의 순환 속에서 또 한 번 매화가 피어나는 이 무렵, 도시의 기억을 다루는 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다가오는 2030년, 남원 춘향제는 어느덧 백 번째 봄을 맞이한다.



​백 년. 한 세기를 관통해 온 축제는 그 자체로 거대한 무형의 박물관이다. 해마다 광한루 주변을 서성이며 쌓아 올린 평범한 이웃들의 웃음과 눈물은 곧 남원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단단하게 다져왔다. 100회를 앞둔 지금, 화려한 일회성 행사를 넘어 우리가 진정으로 몰두해야 할 일은 흩어진 시간의 조각들을 조심스레 주워 모아 하나의 온전한 이야기로 엮어내는 작업, 즉 ‘춘향제 아카이빙(Archiving)’이다. 이는 소멸하기 쉬운 기억의 가치를 미래를 위한 단단한 ‘기록 자산’으로 바꾸어 내는 일이다.



​훌륭한 박물관은 유물이 혼자 떠들지 않고 관람객과 교감하며 숨을 쉰다. 지역의 기록 역시 관공서의 철제 캐비닛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난 100년 춘향제의 진짜 큐레이터는 다름 아닌 남원의 시민들이다. 춘향제 아카이빙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장롱 깊숙한 곳에서 잠자던 빛바랜 흑백 사진, 축제의 들뜬 마음이 적힌 손때 묻은 일기장, 어르신들의 굽은 손마디에 맺힌 지난 삶의 이야기를 정성껏 모으는 일이다. 시민 스스로가 기억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언어로 도시를 이야기할 때, 그 투박하지만 진실한 목소리는 어떤 세련된 전시보다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며 생생한 남원의 풍경을 완성한다.



​이렇게 모인 민간의 기록은 새로운 문화가 끊임없이 샘솟는 마르지 않는 우물이 된다. 옛 춘향제 포스터의 독특한 글씨체, 오랫동안 골목을 지켰던 낡은 간판의 디자인, 대대로 이어져 온 노포의 조리법, 그리고 하루하루를 꼼꼼히 적어 내려간 어느 교감 선생님의 일기장까지. 이 다양한 파편들은 아카이빙을 거쳐 디지털 공간에서 새로운 문화적 자산으로 다시 태어난다. 오래된 기록이 젊은 창작자들의 영감을 깨우고 매력적인 콘텐츠의 배경으로 쓰일 때, 과거와 현재는 비로소 시간의 벽을 허물고 서로를 다정하게 유람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유람이 가능하려면, 흩어진 기억을 꿰어 보배로 만들어 낼 전문적인 손길이 더 필요하다. 도내의 전주, 군산, 익산, 김제, 완주 등의 지자체가 전담 ‘기록관리팀’을 두고, 도외에서는 청주기록원, 이천기록원, 증평기록관 등이 앞장서 행정 기록은 물론 다채로운 민간 기록까지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보존하는 점은 아주 좋은 사례가 된다. 남원 역시 춘향제 100년의 서사를 갈무리하고 남원만의 고유한 궤적을 제대로 담아내기 위해서는, 이를 전담할 전문적인 팀 단위의 조직 구성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할 때다.



​기록을 다루는 사람의 손길이 준비될 때, 기록을 담는 공간도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다. 2019년 문을 연 ‘남원다움관’이 잊혀 가는 남원의 소박한 일상들을 다정하게 품어낸 아담한 공간이었다면, 곧 제 모습을 드러낼 남원다움 제2관 ‘레코드테크’는 춘향제의 짙은 기억은 물론 남원 사람들의 삶이 밴 다양한 민간 기록까지 한데 모아 온전히 보존하고 널리 나누는 차분한 수장고이자 지역 아카이브가 될 것이다.



​백 번의 봄을 건너온 기억들을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모아내는 춘향제 아카이빙. 이는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는 일에 그치지 않고, 지역민과 함께 호흡하는 진정한 지역 기록 문화의 훌륭한 마중물이 될 것이다. 흩어진 백 년의 기억이 제자리를 찾을 때, 남원의 다음 백 년도 그 단단한 토대 위에서 찬란하게 꽃피울 수 있다.

/남원시 기록연구사 권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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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마당 2026-05-13 10:39
지역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가치가 없는 게 아닌데 말이죠. 또 그런 가치가 쌓여야 지역의 진면목이 보이는 건데요. 춘향제 100년이라는 가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요. 말씀해주신 기록과 자료 아닐까요? 남원과 전북이 먼저 기록과 자료를 소중히 여겨 수집, 연구해야만 이 자료들을 활용해 세계에 춘향제를 알리죠! 늦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시작합니다~~~~~ 전북 사랑, 남원 사랑,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