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주 주동 석문과 제사 준비하는 모습
우리나라는 마을마다 고유한 신앙을 하나쯤 품고 산다. 이러한 마을신앙에는 마을이 생겨나게 된 서사가 담겨 있거나 풍요와 우환 등 해결하고자 했던 소망이 서려 있다. 마을 사람들의 하나된 축원과 단결이 응축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마을공동체는 한 배를 탄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에 이러한 무형유산의 전승은 더 없이 값진 보배가 아닐 수 없다.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무주읍 가옥리 주동 마을에는 전북 지역에서 유일한 돌문 거리제가 전승되고 있다. 바로 주동 석문제石門祭이다. 돌문 제사라고 볼 수 있는 이 거리제는 희귀한 마을신앙으로서 전국적으로도 매우 드문 사례에 해당한다. 마을로 들고 나는 옛 길 양쪽에 집체만 한 바위 2개가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인데, 길 양쪽을 지키는 장군신[神將]에 걸맞는다. 다만 옛 길은 사라져 없어졌고, 2개의 바위[立巖]만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주동 석문제는 최근 발견된 축문을 통해 처음으로 제모습이 드러났다. 현재까지도 정월 초사흗날이면 산신제(산제)와 더불어 돌문 앞에서 제사가 행해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제사가 석문제인지 모른 채 오랜 세월 행해져 왔다는 사실이다. 어느 시점부터 전승기억의 핵심 고리가 빠져버린 것이다. 병오년인 올해도 무주 주동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제물을 준비하고, 이장이 제관으로서 산신제와 거리제를 지냈다. 석문제는 두 바위 사이를 새끼줄로 연결한 뒤, 제물을 놓고 간단하게 제사를 지내왔다.
최근에 발견된 주동 석문제 축문은 세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1920년 추정)는 〈주동 석문제단 축문(石門祭壇祝文)〉, 다른 하나(1923년)는 〈주동 석문제 축문〉, 또 다른 하나(1924년)는 〈주동 석문제단 축문〉으로 명명되어 있다. 내용과 분량은 모두 동일하나 문장을 앞뒤로 약간씩 조정하여 사용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석문신장에게 엎드려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축원하면서 억울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위해 석문이 닫히지 않게 해주고, 복(福)이 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화(禍)가 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달라는 바람을 적었다. 특히 신(神)에게 사람이 없다면 명령이나 베품이 없는 것과 같고, 사람에게 신이 없다면 염원을 받아줄 존재가 없는 것과 같다는 신인합일(神人合一)의 관념도 담겨 있다.
세 가지 축문 외에 제목이 없는 축문이 하나 더 있다. 가장 오래된 축문으로 생각되는데, 연대는 확인되지 않는다. 입향조가 산을 열고, 후손들이 마을을 이루었지만, 마을 형편이 기울어 감에 따라 두 개의 바위 문에 축원을 드린다는 서사(敍事)가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는 입암신위(立巖神位)로 표현하였다. 즉 입암신에서 석문신장으로 변화한 것이다. 군자, 소인 할 것 없이 이 길을 밟고 다니게 될 거라 고한 뒤, 안녕과 복록을 축원하였다. 특히 두 개의 바위를 용이 걸터앉고,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형국에 빗대면서 호랑이가 재앙을 쫒아내어 사라지게 하고, 용이 복을 실어 오게 해달라고 빌었다.
주동 마을의 형성은 경주 이씨의 작은 집성촌으로부터 시작된다. 족보에 의하면, 16세기 후반에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므로 산신제와 석문제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적어도 17세기에는 두 제사가 주동 마을의 마을신앙으로 자리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관점에서 산제와 돌문 거리제로 구성된 2원체제의 마을신앙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은 주동 마을 사람들의 신념과 끈기에 기인한다. “조상님들이 계속 해왔던 겅께”.
현재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마을신앙은 하나 둘 사라져가고 있다. 신념을 함께했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남에 따라 지속할 사람도, 해야 할 의미도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형유산의 전승을 강제할 수도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 인구가 급감하고 있고, 시군 역시 지역 소멸 위기에 봉착해 있기에 21세기 지방정부는 슬기로운 방법을 강구(講究)할 필요가 있다. /이종철 문학박사

무주 주동 산신제 모습

💬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