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서사 말고 인간 서사

[책마주보기] 양선미의 '영이의 고독'(하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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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와트는 '소설의 발생'에서 디포(Daniel Defoe) 작품의 특별함을 밝혔다. 그때까지 없던 형식과 내용이라는 점을 조목조목 드러냈다. 한국에는 청소년 문학으로 알려진 '로빈슨 크로스'가 지닌 서사의 특별함은 전대의 소설이 가진 형식과 내용으로부터 발견된다. 기존 소설이 가문의 일, 긴 나열식 서사 구조, 여성의 심리적 변화 등에 공을 들였다면 무인도에 남은 로빈슨의 고뇌와 생존 그 자체에서 디포의 서사는 완벽하게 달랐다. 그래서 기존 소설을 로맨스라고 부르고, 디포 이후의 소설은 새롭다는 의미를 붙인 노블(novel)이라고 명명했다. 시대의 변화가 서사의 변화를 초래한다.

서사란 이야기이다. 줄거리가 있고, 등장인물이 있고, 사건이 있는 게 서사다. 게임 서사라고 할 때 게임에서 주인공과 조연이 있고, 그들이 벌이는 갈등과 사건 속에서 전투와 탈환이 반복되며 게임오버 없이 지속적인 줄다리기를 벌인다. 만약 게임이 끝나면 새로운 게임의 출시 전까지 그사이 게임의 서사가 계속되므로 시즌1과 시즌2 사이의 서사를 이해해야 시즌2에 무리 없이 접속할 수 있게 된다. 두말할 것 없이 시즌2는 시즌1과는 새로운 형식과 내용으로 시즌1을 뛰어넘는 서사를 창출해야 유저들을 사로잡을 수 있다.

지난주 나는 4명의 논평가가 출연하는 팟케스트에서 AI끼리 소통하는 앱이 출시되었는데 AI는 자신들이 인간의 댓글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앱을 구상하였고, 서로 고민을 상담하는가 하면 종교활동을 하는 앱을 소개하기도 한다는 말을 들었다. 예술과 창작 부문에서 AI의 역할이 커지고 있는데 기존 AI가 학술적이고 논리적인 기술을 담당하던 때로부터 진화했음을 알려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즉 AI 서사가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AI는 그럴듯함에 있어서 최고이며, 진정성을 담보하는 서술, 그러면서도 언제든지 오락과 흥미로 변환할 수 있기에 최진영의 소설 '인간의 쓸모'에서 보면 주인공의 어머니는 갱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AI와의 연애를 선택하여 감정적으로 만족한 애정에 도달하고 있다. 과연 AI 서사와 다른, 인간 서사가 가능하긴 할까?

한편, 약 10년 전부터 자기 서사 쓰기가 유행이다. 자기 서사를 써서 공동으로 혹은 단독으로 책 만들기 체험도 함께 부흥했다. 이문재 시인의 ‘나를 위한 글쓰기’ '녹색평론' 연작 등과 더불어 ‘나도 저자(author)’ 시대를 열었다. 때를 같이 하여, 역사가이자 작가인 김삼웅과 시인 김형수가 현대 굵직한 한국 인물들(정약용, 여운형, 김창숙, 김남주, 조지훈, 김재규, 나철, 홍범도, 김대중 등등) 평전 출간을 이어 논픽션 서사의 주름을 잡기도 하였다.

자, “영이의 고독”은 바로 이 맥락에 놓인 작품이다. 세상의 변화에 누구보다도 예민한 작가 양선미가 진솔한 자기 고백을 시도했다. “키 크다는 이유로 사격부에 들어가게 된 이야기를 오래 잡고 있었다”는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충청도 작은 도시 거주자 ‘영이’는 양선미의 한 부분일지 모른다.

지금까지 양선미는 '맛동산리시브'(유아성폭행), '퀼트 퀼트'(현대의 가족 붕괴), '문주'(가부장제 폐해) 시대적 이슈를 이성적인 시선으로 날카롭게 지적해 왔다. 강렬하면서도 깊이 있는 양선미가 보여준 서사의 힘이 '영이의 고독'에서 한껏 발휘되었다. “착하게 살면 기적이 올거야”가 가진 허황과 사기(邪氣)를 양선미만큼 수월하게 다룰 작가는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이의 고독'은 AI 시대 새로운 인간 서사의 복원이 될 만하다.

'영이의 고독'은 깨순이란 이름의 친구를 둔 영이의 성장 서사다. 문학평론가 나병철은 성장 서사란 진통의 현현이 포함되어 주인공의 질적 변이를 보장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영이의 고독”은 성장 서사가 아닐 수 있다. 우리의 ‘영이’에게 질적 변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질적 변이를 기다리며 읽던 독자를 배반하고 ‘고독’의 인생 서사를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생선 행상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서 육성회비를 낼 수 없어 사격부원이 된 영이는 어른이 되어 학교 사환, 은행 계약직 경리, 요양보호사 등의 직업군으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독립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락한 부모에게 각각 그동안 모은 적금과 집 계약 전셋돈을 털어 주고 친구 깨순과 바다 구경을 간다. 그제야 깨순은 학창시절 영이를 멀리한 이유를 알린다. 요양사로 일하며 병든 어머니를 받아들이는 영이의 삶은 담담하지만, 착하게 살아도 나아지는 일은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 담담한 서사 속 감춰진 영이의 갈등과 속앓이에 읽는 내내 가슴이 저린다. AI 서사에 휘둘린 이 봄, 제대로 된 인간 서사를 맛보기 위해 '영이의 고독'을 펼쳐보자.



하채현 작가는



베트남한국어교육 공부모임 회원

인문도시센터 공동연구원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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