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는 설이 비교적 늦은 탓에 정월대보름도 예년보다 한 달 가까이 늦게 찾아왔다. 마트에 들렀다가 대보름 음식 부스를 보고서야 엊그제가 설 연휴였는데 벌써 보름이 지났음을 실감했다. ‘정월대보름’은 한 해의 첫 보름이자 보름달이 뜨는 날로 음력 1월 15일에 지내는 우리나라의 명절이다. 1월 1일은 1년이 시작하는 날로서 당연히 의의를 지녀왔지만 달의 움직임을 표준으로 삼는 음력을 사용하는 사회에서는 첫 보름달이 뜨는 대보름날이 더 중요한 뜻을 가져온 듯하다.
설이 지나고 처음 맞는 큰 보름날이지만 공휴일로 지정되지 않아서 그런지 설 명절에 묻혀서 요즘은 존재감이 사라진 것도 같고 일상 속에서 특별히 챙기지 않게 된 지도 오래다. 그래도 정월대보름만큼 전통 풍속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명절은 흔치 않다. 아직도 이즈음에는 약밥, 견과류 정도는 먹고 내가 해 먹지 않아도 주변에서 나누어주기도 하고 마트에서도 손쉽게 살 수 있다. 부모님 세대에는 시골동네마다 달집태우기도 하고 그랬다던데 요즘은 농촌에 달집태우기 준비할 인력도 없거니와 괜히 불이라도 번지면 어쩌냐는 우려가 더 크다. 아마 많은 이들이 비슷하지 않을까. 교과서에서 세시풍속을 배우지만 생활 속에서 직접 실천하는 일은 점점 줄어든다. 농경 사회의 절기였던 만큼 도시의 삶과는 거리가 생겼고, 둥근 달이 떠오르는 밤도 예전처럼 마을 전체가 함께 기다리는 시간은 아니다. 그렇게 정월대보름은 알고는 있지만 굳이 챙기지 않는 날로 변해가고 있다.
그렇다고 이 전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역의 축제도 남아 있고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자리들이 있다. 며칠 전 남원 지리산 와운마을의 천년송에서도 당산제가 열렸다. 남원 진기리 느티나무에서도 매년 정월대보름에 당산제가 진행된다. 두 나무는 수령이 오백년 이상 되는 천연기념물이다. 천연기념물이 아니어도 지역의 오래된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수령이 오래된 보호수, 노거수들이 있다. 평소에는 그저 마을 어귀에 서 있는 큰 나무처럼 보이지만, 이즈음이면 그 아래에서 당산제가 열리고 마을 사람들은 음식을 마련하고 제를 올리며 한 해의 안녕을 함께 기원한다. 이 나무들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오랜 세월 마을의 중심을 지켜온 상징이자 공동체의 기억을 품은 존재다. 비바람을 견디며 수십, 수백 번의 대보름을 지나오는 동안 그 아래에서는 풍년을 빌고, 재앙을 막아 달라 기도하며, 마을의 화합을 다지는 시간이 반복되었으니, 나무는 말이 없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그 자리에 겹겹이 쌓였다.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이 공간은 마을의 역사와 삶이 축적된 유산인 것이다. 단순히 오래된 나무라서 희귀해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공동체의 의식이 담겨있는 시간의 결과물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때로 국가유산을 보며 그 자체에만 매몰되어 현상의 변형유무만 신경쓰는 경우가 많은데 그 유산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정월대보름의 의미도 결국 여기에 닿아 있다. 둥근 달은 하늘에 떠있지만 그 달을 바라보는 마음은 서로를 향해 모인다. 함께 빌고 함께 나누고 함께 한 해를 시작하겠다는 다짐이다. 요즘처럼 각자의 일정이 빽빽한 시대, 우리보다는 나를 중심으로 사는 시대에는 이런 시간이 더욱 낯설게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오래된 나무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듯 공동체를 향한 바람 또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대보름 밤, 잠시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보자. 그리고 어딘가 마을 어귀의 나무 아래에서 이어지고 있을 작은 제의를 떠올려 본다. 국가유산은 거대한 사찰이나 성곽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렇게 사람들을 다시 모이게 하는 자리, 함께 안녕을 기원하는 시간 역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둥근 달 아래에서 나무처럼 서로를 지탱하는 마음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는 것, 그것이 오늘 정월대보름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의미일 것이다.
한편, 전북동부 문화유산돌봄센터는 국가유산청과 전북특별자치도청의 지원을 받아 도내 동부권역 8개 지역의 390개소 국가유산을 관리한다. 국가유산의 정기적인 상태 모니터링과 재질별 전문 모니터링, 경미한 수리와 일상적 관리를 통해 예방 보존하고 있으며, 국가유산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보존 및 관람환경을 개선한다. /최유지(전북동부문화유산돌봄센터 모니터링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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