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년 넘게 공직에 몸담아 오면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을 맡을 때마다 떠올리는 글귀가 있다.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다. 소동파의 ‘인간도처유청산(人間到處有靑山)’을 원용한 표현이다. 인간도처유청산이 사람이 몸을 의탁하고 살아갈 곳은 어디에나 있다는 뜻이라면, 인생도처유상수는 가는 곳마다 뛰어난 고수가 있다는 의미다. 한 달 전부터 원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국립농업과학원이 바로 그런 곳이다.
농촌진흥청 소속기관은 식량·원예·축산 등 작목 중심 기관과, 토양·물·환경·농약·농기계·종자 등 기초기술을 다루는 기관으로 나뉜다. 국립농업과학원은 작목이 아니라 이러한 기초기술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농업의 토대를 이루는 과학을 다루는 곳이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군에서 레이더를 운용하며 항공관제 장교로 근무했던 한 연구원이 있다. 그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세계 최초로 라디오파 가열 기술을 소고기 숙성에 적용해 ‘라디오파 단기 숙성기술’을 개발하고 산업화했다. 소고기 숙성은 고기 속 효소가 결합조직 단백질을 분해해 아미노산을 생성하고, 육질을 부드럽게 하며 풍미를 높이는 과정이다. 기존 건식 숙성은 수 주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이 기술은 약 30℃ 전후의 저온 조건에서 고기 내부를 라디오파로 가열하고, 표면은 냉풍으로 냉각·건조시키는 방식을 통해 세균 증식 위험을 최소화하면서도 48시간 만에 3주 이상 건식 숙성과 유사한 효과를 구현했다. 산업 경쟁력과 소비자 만족도를 동시에 높일 수 있는, 이른바 ‘게임 체인저’가 되는 기술이다.
전국의 토양을 꿰뚫고 있는 연구원도 있다. 지표 식생과 지형만 보고도 땅을 파지 않고 토양의 성격을 가늠한다. 일상에서 ‘흙’은 그저 밟고 다니는 존재지만, 학문적으로 토양은 지질학과 화학이 결합된 복합 학문 분야다. 형성과정은 매우 느리다. 일반적으로 흙 1cm가 만들어지는 데에는 수백 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만큼 토양은 오랜 시간의 산물이다. 독도의 토양이 울릉도의 토양과 다르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독도통’이라는 새로운 토양 분류단위를 정립한 연구도 우리 연구진의 성과다. 단순한 흙이 아니라, 과학으로 증명된 영토의 기록이 된 것이다.
국립농업과학원에는 세계 두 번째이자 아시아 최초로 조성된 ‘세계종자안전중복보존시설’도 있다. 미래 유망산업이자 ‘제2의 반도체’라 불리는 종자의 보존과 연구개발을 수행하는 공간이다. 동시에 국제유전자원협력훈련센터로서 여러 나라 연구자들이 한국의 종자은행 시스템을 배우러 오는 곳이기도 하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식량 안보의 최전선을 지키는 현장이다.
구슬이 아무리 많아도, 그저 꿰기만 해서는 보석이 되지 않는다. 누가 차게 될 것인지, 어떤 자리에서 빛날 것인지에 따라 색과 크기를 맞춰 엮어야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된다. 국립농업과학원이 개발한 수많은 기술도 마찬가지다. 농장 규모에 맞게, 지역 여건에 맞게, 소비자 요구에 맞게 정교하게 연결될 때 비로소 가치가 완성된다.
각자의 자리에서 오랜 시간 실력을 쌓아온 이들이 바로 ‘상수’들이다. 원장으로서 나는 이 상수들과 함께 구슬을 꿰어 보석을 만드는 일을 하고자 한다. 가는 곳마다 고수가 있다는 말이 실감나는 요즘, 그들과 함께 농업의 기초를 더 단단히 다져갈 생각에 새해의 출발이 더욱 벅차다./국립농업과학원장 성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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