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는 눈앞의 개발로 성장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땅속의 역사 위에서 정체성을 얻는다. 매장문화유산은 한 번 훼손되면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여러 도시는 개발 이익을 잠시 미루고, 자치단체가 토지를 선도적으로 매입해 보존·연구·활용의 길을 선택해 왔다. 그 결단은 시간이 지나 도시의 품격과 경쟁력으로 돌아왔다.
경주 – 선매입과 역사 도시 보존의 모델
경주는 1970년대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통해 황룡사지, 월성, 대릉원 일대를 단계적으로 매입하며 고도 보존 정책을 본격화했다. 당시에는 예산 부담 논란이 있었지만, 그 축적은 2000년 세계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 등재로 이어졌고 오늘날 대한민국 대표 역사도시의 위상을 만들었다.
공주·부여 – 백제왕도 보존의 전략적 선택
공주와 부여는 1980~2000년대에 걸쳐 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소산성, 정림사지 일대의 토지를 지속해서 매입하며 백제왕도 핵심유적을 정비했다. 개발 압력은 있었지만, 지방정부는 고도 보존을 우선했다. 그 축적된 행정은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등재로 열매를 맺었다. 선매입은 단순한 토지 취득이 아니라, 왕도 정체성을 미래 자산으로 전환한 전략이었다.
익산·고령 – 늦지 않은 결단이 만든 성과
익산은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의 토지를 장기간 매입·정비하며 발굴과 복원을 병행했고, 백제왕도 고도 보존과 세계유산 등재 이후 연구·관광·교육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고령 역시 지산동 고분군 일대를 보존하기 위해 토지를 확보하고, 대가야박물관을 중심으로 지역 정체성을 확립했다. 매입 당시에는 ‘왜 지금인가’라는 질문이 따랐지만, 오늘날은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브랜드가 되었다.
서울 풍납토성 – 특별법과 공공매입의 선례
서울 풍납토성은 공공 매입과 주민 보상을 병행하며 보존을 추진한 사례다. 개발 제한으로 갈등이 있었으나, 공공이 재정과 제도로 책임을 지며 문제를 해결했다. 이는 보존을 위한 공공 책임이 실제 행정으로 구현된 선례다.
일본 나라·아스카 – 국가와 지자체가 앞장선 유적공원 조성
해외에서도 같은 흐름이 확인된다. 일본 나라는 헤이조궁 터와 아스카 지역 유적을 국가와 지자체가 장기간 매입해 유적공원으로 조성했다. 개발을 멈추고 공공이 책임을 지는 선택이었다. 그 결과 그 공간은 일본 고대국가 형성을 상징하는 역사공원으로 자리 잡았다. 보존을 위한 선투자는 결국 도시와 국가의 자산이 되었다.
이들 도시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개발 논리를 잠시 뒤로 미루고 선제적으로 공공이 먼저 토지를 매입해는 책임졌다는 점이다. 전주는 그보다 늦은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결정은 모험이 아니다. 이미 검증된 길이다.
종광대 재개발구역 조합원들은 아파트 건축을 위해 이주비, 행정절차 비용 등 상당한 매몰 비용을 감내했다. 그문화유산 보존이라는 공공의 가치를 위해 사업을 멈춘 선택이 존중받지 못한다면, 앞으로 어떤 시민이 공공의 결정을 신뢰하겠는가.
3월 전주시가 편성할 480억 원 규모의 보상 예산은 특혜가 아니다. 이는 보존을 선택한 시민에게 공공이 약속을 이행하는 절차다. 의회가 이를 통과시키는 일은 특정 사업을 돕는 것이 아니라, 전주가 역사도시로 나아가겠다는 방향을 제도적으로 확정하는 행위다.
문화유산은 공공의 자산이다. 그렇다면 그 보존을 위해 감내한 개인의 손실 역시 공공이 책임지는 것이 정의다. 종광대 조합원들의 대승적 결단이 장기적 경제적 부담과 불안으로 남지 않도록, 전북특별자치도와 전주시, 그리고 의회는 도시의 신뢰를 지켜야 한다.
도시의 품격은 높은 건물에서 나오지 않는다. 약속을 지키는 태도에서 나온다. 지금의 결정은 단지 한 해의 예산을 다루는 일이 아니다. 전주가 어떤 가치를 기준으로 미래를 설계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선택이다.
시간은 모든 결정을 평가한다. 오늘의 판단은 언젠가 전주의 역사로 남고, 그 기록은 후대가 이 도시를 어떻게 기억할지를 결정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지키는 원칙과 신뢰가 내일 전주를 설명하는 문장이 되기를 기대한다./노기환(온문화유산정책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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