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을 거슬러 2018년 5월, 나는 스스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했다. 단순히 서류 한 장에 서명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의사로서, 그리고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한 인간으로서 나의 마지막이 기계음에 묻히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마무리되길 바라는 간절한 선언이었다.
그해 나는 내가 몸담고 있는 진안군 의료원을 전라북도 최초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기관으로 등록시켰다. 초고령 사회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진안군에서, 어르신들이 삶의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의료기관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 현장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며 느꼈던 고민들이 최근 대통령의 한 마디로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대통령의 지시, 그 이면에 담긴 의료 현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임종을 앞둔 환자가 연명치료를 중단할 경우 건보 수가나 본인 부담금을 차등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돈 때문에 생명을 포기하라는 것이냐", "현대판 고려장 아니냐"는 격한 비판을 쏟아내기도 한다. 생명을 경제적 논리로 재단한다는 거부감일 것이다.
하지만 의료 현장의 최전선에 있는 의사로서, 그리고 일찍이 연명의료 결정제도의 정착을 위해 뛰었던 당사자로서 나는 이번 검토 지시에 대해 '적극 찬성'의 입장을 밝히고 싶다. 이는 단순히 건강보험 재정을 아끼자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무의미한 고통의 연장'을 멈추고, 환자와 가족에게 실질적인 선택권을 돌려주기 위한 필수적인 제도적 보완이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연명치료가 남기는 것들
우리는 병원에서 소생 가능성이 전혀 없는 말기 환자에게 행해지는 기계적인 연명치료를 너무나 자주 목격한다. 온몸에 튜브를 꽂고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가쁜 숨을 몰아쉬는 환자, 그 곁에서 엄청난 병원비를 감당하며 죄책감과 경제적 고통 사이에서 피라 마르는 가족들의 모습은 비극 그 자체다. 이것을 과연 '효(孝)'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것이 과연 의학이 추구하는 '생명 연장'의 참된 의미일까?
현재의 건강보험 체계는 아이러니하게도 더 많은 검사, 더 많은 시술, 더 긴 입원을 할수록 병원의 수익이 늘어나는 구조다. 의학적으로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도 방어 진료나 가족들의 막연한 기대로 인해 고가 장비가 투입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중환자실이 절실히 필요한, 소생 가능한 환자의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인센티브, 죽음을 권하는 것이 아니라 존엄을 돕는 것
연명치료 중단 시 건강보험 인센티브를 제공한다는 것은, 죽음을 돈으로 사고파는 것이 아니다. 가족들이 경제적 부담 때문에 연명치료 중단을 주저하거나, 반대로 경제적 이유만으로 치료를 포기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막아주는 '완충장치'가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완화의료를 선택했을 때 본인 부담금을 파격적으로 낮춰주거나, 그 절감된 재원을 환자의 존엄한 임종을 돕는 간병비 지원, 장례 지원 등으로 환원하는 방식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환자가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며, 가족들에게는 "돈 때문에 치료를 포기했다"는 죄책감 대신 "고통 없는 편안한 길을 선택해 드렸다"는 위로를 줄 수 있는 기제가 될 것이다.
진정한 '웰다잉(Well-dying)'을 위한 사회적 합의
건강보험 재정의 고갈 우려는 현실이다. 한정된 의료 자원은 정말 살릴 수 있는 생명, 치료가 시급한 필수의료 분야에 집중되어야 한다. 회생 불가능한 단계에서의 과도한 의료 자원 투입을 줄이고, 그 재원을 호스피스 인프라 확충과 필수의료 강화에 쓰는 것이야말로 정의로운 분배다.
2018년, 진안군 의료원에서 전북 최초로 등록기관의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지역 어르신들의 눈망울을 기억한다. "자식들에게 짐 되기 싫다", "갈 때는 편안하게 가고 싶다"며 떨리는 손으로 서명하시던 그 모습들이다. 그분들이 원했던 것은 기계에 묶인 1분 1초의 연장이 아니라, 가족의 온기를 느끼며 맞이하는 평온한 작별이었다.
정부의 이번 검토가 단순히 '비용 절감'이라는 경제적 프레임에 갇히지 않기를 바란다. 대신 우리 사회가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마무리하는 것이 진정 인간다운 것인가를 고민하는 성숙한 논의의 장이 되기를 희망한다.
의료진으로서, 그리고 8년 전 스스로 존엄한 죽음을 서약했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인센티브 도입이 우리 사회를 진정한 '웰다잉'으로 이끄는 용기 있는 첫걸음이 되리라 확신한다. 이제는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어떻게 마지막을 맞이하느냐'에 대해 국가가 답을 내놓아야 할 때다.
/조백환 전북대 의과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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