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동학19] 동학농민군 제노사이드를 총지휘한 대본영 병참총감 가와카미 소로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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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는 1904년에 일본 참모본부 편으로 간행된『메이지이십칠팔년일청전사』(明治二十七八年日淸戰史)에 실려 있는 동학농민군 학살(Genocide)을 주도한 일본군 부대 일람표이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학농민군 학살을 주도한 부대는 동학농민군 진압 전담부대로 파견된 후비보병(後備步兵) 제19대대를 필두로, 후비보병 제18대대 제1중대(서울 수비대), 후비보병 제6연대 제6중대(인천-용산 수비대), 후비보병 제10연대 제4중대(부산 수비대)가 주축이었다. 이들은 모두 히로시마에 있던 대본영(大本營) 직할 부대로 병참총감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1848-1899, 아래 사진)로부터 직접 지시와 명령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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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전원살육’을 주도한 대본영 병참총감 가와카미 소로쿠>



대본영은 청일전쟁에 대비할 목적으로 1894년 6월 5일에 참모본부 안에 설치되었다가 9월 8일에 히로시마로 옮겼으며, 히로시마 대본영에서 동학농민군에 대한 ‘전원살육작전’ 즉 제노사이드를 주도하게 되고, 그것을 진두지휘한 자가 바로 가와카미 병참총감이었다. 가와카미가 동학농민군을 ‘모조리 살육하라’며 전원살육 명령을 내린 것은 10월 27일(음력 9월 29일)이었다. (아래 사진 참조) 이틀 전인 10월 25일에 부산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일본군 병참선(兵站線) 수비를 위해 설치되어 있던 가흥(可興) 병참사령부, 충주(忠州)와 안보(安保) 병참지부가 동학농민군에 의해 포위⬝공격당하는 위기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가와카미 병참총감의 살육 명령은 “동학당에 대한 처치는 엄렬(嚴烈)을 요(要)한다. 향후 모조리 살육할 것”이라 하는 무서운 명령이었다. 이 명령은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하는 동학농민군뿐만 아니라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숨어 있는 동학농민군이나 동학 신자들까지도 모조리 죽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명령은 19세기 말 당시의 전시국제법(戰時國際法)을 명백하게 위반하는 것이었다.

‘동학당은 모조리 살육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다음 날인 10월 28일, 대본영 가와카미 병참총감은 시모노세키 수비 임무를 띠고 대기하고 있던 후비보병 제19대대에게 조선으로 출병(出兵)할 것을 명령했다. 대대장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1842-1921)는 즉시 대본영이 있는 히로시마로 명령을 수취하러 갔다. 같은 날, 대본영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총리대신과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有栖川宮熾仁, 1835-1895) 참모총장은 서울의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1836-1915) 특명전권공사에게 동학농민군 진압을 전담하는 3개 중대 즉 후비보병 제19대대가 선박이 준비되는 대로 조선을 향해 출발한다는 내용의 전보를 쳤다. 후비보병 제19대대는 명령에 따라 11월 2일부터 5일에 걸쳐 히로시마를 출항하여 11월 7일 인천에 상륙, 이튿날 서울 용산에 도착했다.

이상과 같이,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전원살육 작전은 일본 정부와 대본영이 함께 입안(立案)하여 실행한 ‘국가에 의한 제노사이드’로서 일본 정부에 대해 학살 책임을 묻고 사죄를 받아내야 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 그 첫걸음이 바로 사료에 근거한 정확한 사실 규명일 것이다.

한편,『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은 1893년 4월부터 7월에 걸쳐 12회에 걸쳐 가와카미 소로쿠의 조선과 청국 ‘시찰’을 보도한 바 있다. 열두 번의 기사 중에 세 번을 제외하고 모두 1면에 실릴 정도로 중요 기사로 취급된 가와카미의 조청(朝淸) 양국 ‘시찰’은



가와카미 참모본부 차장

가와카미 중장이 조선으로 향했다는 풍설이 나도는 가운데『나가사키신보』는 한 가지 괴보 를 전했다. 그 괴보에 이르기를, 지난 16일 사츠마마루(薩摩丸)에 4명의 상인이 승선하고 있 었는데 모두 상등 선객으로 포람사덕(浦藍斯德; 블라디보스톡) 관광이라는 명목으로 승선하 고 있지만, 그 용모와 위풍이 심상한 일개 상인들로 볼 수 없으며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어 변명(變名)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탐문했더니, 과연 그들은 참모본부 차장 가와카미 소로쿠, 제1국 국원 보병 소좌 타무라 이요조(田村怡与造), 포병 대위 오하라 텐(小原伝), 육군대학 교 교원 모 등 4명이었다. 이를 보면 동 중장 등이 조선으로 미행(微行)하고 있다는 것은 의 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朝野新聞』 1894년 4월 26일, 2면)



라는 기사 내용처럼 비밀리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비밀리에 조선행을 한 목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먼저 조선 정부 지도자 및 조선에 주재하고 있는 청국 고위관리들을 만나 조선을 둘러싼 정세를 파악하는 한편, 강화도와 인천에서 시작하여 서울에 이르는 한강 유역의 전략적 요충지들을 시찰하고, 조선에 주재하고 있던 일본 군함 야에야마함(八重山艦)을 비롯하여 주한 일본 공사관 및 각 영사관 관리들을 만나 정보수집 활동을 독려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장차 있을 전쟁 대비가 목적이었다. 다음의 기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가와카미 육군중장 일행

(전략) 지난 4월 26일 인천에 도착, 그다음 다음날인 28일에 육로로 경성으로 향하여 진고 개(泥峴)의 영희정(永喜亭)에 투숙하였으며, 30일은 지나공사관(支那公使館; 청국공사관)의 원유회(園遊會)에 초대를 받았다. 5월 1일 대원군을 운현궁에서 면알(面謁)하고, 5일 입궐하 여 국왕 전하를 배알하였으며, 6일 용산진(龍山津)에서 강화협(江華峽)의 정족산성(鼎足山 城) 기타 한강 연안의 고전장(古戰場) 순시 도중에 있었으며, 그 사이 원세개 씨를 비롯하여 조선 관민의 방문이 끊임이 없었다. (『東京朝日新聞』 1893년 5월 14일, 1면)



가와카미 참모본부 차장 일행

(전략) 그간 인천 경성 간 체재 중에는 근방 각지 병요상(兵要上)의 형세를 정밀(精密)하게 답사를 했는데, 차장이 다른 사람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이번 답사는 책상 위에서 하는 조사 와는 달리 군사상(軍事上) 크게 발명(發明)한 바가 있었다고 한다.

(『東京朝日新聞』1893년 5월 17일, 2면)



“근방 각지 병요상(兵要上)의 형세를 정밀(精密)하게 답사함”으로써 “책상 위에서 하는 조사와는 달리 군사상 크게 발명한 바가 있었다”고 가와카미 스스로가 말한 것처럼 그의 조선 ‘시찰’은 장래 예상되는 전쟁에 대비하여 군사상 필요한 지형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동시에 필요한 군사 정보 수집이 목적이었다. 이에 대해 가와카미 전기(아래 사진 참조)를 쓴 바 있는 도쿠토미 초이치로(德富猪一郞, 1863-1957)도 “대장은 비단 그 부하 장교를 조선, 지나(支那; 청국), 중앙아시아, 남양군도에 파견하여 각지의 정보를 수집하고, 대륙작전의 조사 연구에 도움이 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이 직접 조선과 지나 여행을 계획하여 작전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하고자 하였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1894년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이어서 청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와카미는 참모본부 참모차장 겸 병참총감으로서 히로시마 대본영에서 동학농민군에 대해 전원살육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동학농민군을 전라도 서남부 연안으로 내몰아 궤멸시키는 작전을 구사했다. 그러나 가와카미의 동학농민군 전원살육 명령 배경에 그가 1893년에 조선을 ‘시찰’하여 사전에 치밀한 정보수집과 전략상의 요지를 직접 ‘시찰’함으로써 철저하게 대비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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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육군대장 가와카미 소로쿠 전기』(東京, 第一公論社, 1942年)

아래:「타무라 이요조 수기」(『현대사자료 37: 대본영』, みすず書房, 1967), 『타무라 이요조전』(山梨ふるさと文庫, 2004) >



동학농민혁명 1년 전, 가와카미의 조선 ‘시찰’을 수행한 참모본부 요원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역시 지금까지 알려진 바가 없었다. 가와카미를 수행했던 요원은 다음과 같다.

참모본부 제 1국 국원 육군소좌 타무라 이요조(田村怡与造)

참모본부 제 2국 국원 육군포병소좌 이지치 코스케(伊地知幸助)

육군경리학교 교관 육군삼등감독 사카다 이와조(坂田嚴三)

참모본부 제 2국 국원 육군포병대위 시바 고로(柴五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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