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은희의 개인전 <수세미 자서전>은 생태순환의 메시지를 전하는 예술 프로젝트다.
‘수세미를 1년간 재배한 <수세미 자서전> 프로젝트는 죽어감의 기록이다. 생태순환의 부조리한 현실에 화두를 던지고 싶어서 나는 수세미가 되었다. 수세미가 되어 발아에서 탄생과 성장, 소멸의 순환을 온몸으로 감각했다. 존재가 겪는 죽고 사는 예사로운 일 안에 내 죽음도 있길 바란다.’(작가노트. 2025)
복합문화지구 누에아트홀에서 릴레이 형식으로 ‘결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12월 중반부터 완주 작가들의 개인전이 진행되고 있다. 이 전시는 완주문화재단 2025 전문예술창작지원사업 창작지원금으로 제작․운영되었다.
여은희는 이번 개인전에 영상과 드로잉, 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여은희는 온전히 마음을 쏟은 아카이브 작업으로 책 출간을 이번 프로젝트의 가치로 꼽는다. 한 생태 예술가의 시선으로 1년간 텃밭에서 수세미를 재배하고 기록하고, 창작의 매체로 사용한 과정을 책으로 엮었다.
비평을 써준 천윤희(독립기획/연구자) 선생님의 글 중 일부를 아래에 옮긴다.
소멸의 아름다움과 생명 순환에 관한 예술 자서전 수세미가 되기로 한 마음
"나는 수세미가 되었다." 여은희 작가의 이 단호한 선언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2024년의 실험기를 거쳐, 2025년 한 해 동안 이루어진 치열한 관찰과 노동, 그리고 존재론적 동화(同化)의 결과물이다.
작가는 수세미의 파종부터 수확까지, 탄생에서 소멸에 이르는 전 과정을 온몸으로 경험하며 자신을 수세미와 일치시켰다. 이는 대상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전통적 관찰 방식과는 다른, 철저한 몰입과 공감을 통한 생태적 인식의 한 방법이다.
<수세미 자서전>은 제목 그대로 수세미의 일대기이자, 동시에 작가 자신의 자서전이기도 하다. 김혜순 시인의 『죽음의 자서전』에서 영감을 받은 이 전시는 죽음과 소멸을 삶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며, 생태순환의 아름다움을 탐구한다. 작가가 기록한 560개의 수세미는 각각이 고유한 생의 궤적을 지닌 개별 존재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가 겪는 보편적 생명의 순환을 상징한다.
시간의 관찰과 기록: 생성과 소멸의 미학
<수세미 자서전>의 가장 큰 미덕은 시간의 흐름을 빠짐없이 기록했다는 점이다. 작가는 4월 11일 첫 파종부터 11월 28일 마지막 수확까지, 거의 매일 텃밭을 찾아가 사진을 찍고 드로잉하며 글을 썼다. 이 기록들은 단순한 성장 과정의 나열이 아니라, 한 생명체의 전 생애를 입체적으로 담아낸 '생명의 아카이브'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작가가 아름다운 순간만이 아니라 쇠락과 부패의 과정도 세심하게 기록했다는 것이다. "검버섯이 피었네(9월29일)"라는 제목의 기록에서 작가는 "작고 흐릿한 붉은 갈색의 반점들"을 관찰하며 노화의 징후를 포착한다. "중년 수세미(8월21일)", "할머니 수세미"(9월26일)와 같은 표현들은 수세미의 생애 주기를 인간의 삶에 비유하면서도,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작가가 "썩고 있는 수세미를 바라보다, 버리지 않고 챙겼다"(9월 29일)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수세미의 노화와 소멸의 과정까지 보여주는 게 이 프로젝트의 진정한 의미"라는 깨달음은, 완성되고 아름다운 것만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의 미학에 대한 조용한 저항이다. 여은희는 소멸 그 자체를 '소멸의 미'로 재발견하며, 죽음을 삶의 대척점이 아닌 순환의 한 과정으로 인식하게 한다.
노동과 예술: 협업하는 존재
<수세미 자서전>은 막대한 육체노동을 수반한 프로젝트였다. 작가는 "10월과 11월은 매일 아침 걸어서 텃밭에 갔다. 갈 때마다 농익은 수세미 7~12개를 거두었고, 껍질을 벗기고, 씨를 빼서 널었다"고 기록한다. 매일의 노동, 그것도 폭염과 장마, 모기와 씨름하며 진행된 노동의 결과물이 560개의 수세미다.
이 노동은 단순한 작품 제작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작가가 인용한 카렐 차페크의 『정원가의 열두 달』의 구절들은 노동 그 자체가 명상이자 존재의 방식임을 시사한다. "삽을 든 사람" 자체가 "하나의 조각 작품이자 기념비"라는 인식, "흙을 만지며 혼자 놀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작가에게 노동이 단순히 힘든 일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행위임을 보여준다.
특히 부모님과의 협업은 이 작업에 특별한 깊이를 더한다. "아빠의 노동, 엄마의 수고로움, 나의 성실함"으로 이루어진 수세미 재배는 세대 간의 지혜 전수이자, 가족이라는 관계망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태적 실천이다. 작가가 "뭉클한 마음들로 채워진다"고 표현한 감정은, 예술이 고립된 개인의 창작이 아니라 공동체와의 협력 속에서 완성됨을 보여준다.
죽음을 껴안은 삶의 예술
"나는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이 솔직한 고백은 죽음을 터부시하는 현대사회에서 용기 있는 발언이다. 작가는 "죽음을 인식할수록 생을 당당히 마주할 수 있었다"고 말하며, 수세미 프로젝트가 자신에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연습이었음을 밝힌다.
결국 <수세미 자서전>은 한 식물의 전기이자 한 예술가의 자서전이며, 더 나아가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는 보편적 서사다.
"숨 있는 모든 존재가 겪는 죽고 사는 예사로운 일 안에 내 죽음도 있길 바란다"는 작가의 소망은, 생태적 순환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는 겸손한 태도이자, 죽음까지 포함한 온전한 삶을 살아내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다.
이 전시를 보는 관객들은 560개의 수세미를 통해, 자신의 생과 죽음을 다시 사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유의 끝에서, 우리는 작가가 수세미를 통해 발견한 진실과 만나게 될 것이다.
소멸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는 생태적 지혜와 그 자체의 아름다움 말이다.
생태적 순환의 실천: 가능성의 탐색
<수세미 자서전>은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생태순환의 부조리한 현실에 화두를 던지고 싶어서"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밝힌다. 여기서 '부조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자연의 순환 법칙을 무시한 채 무한 성장과 축적만을 추구하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작가는 일지 곳곳에서 이상기후, 폭염, 무역전쟁, 수입과일 가격 상승 등 생태위기의 징후들을 기록한다. "이상기후의 진행 속도가 무섭게 빠르다", "이상한 무더위 탓"이라는 표현들은 작가가 수세미를 재배하며 직접 체감한 기후위기의 현실이다. 또한 "천연 수세미를 다시 사용하는" 생태적 삶에 대한 언급은, 플라스틱 수세미로 대체된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작가가 인용한 올가 토카르추크의 "플라스틱 봉투가 300년 동안 전혀 분해되지 않는다"는 구절, 유발 하라리의 "과식"에 대한 지적, 피에르 라비의 "우리가 무절제하게 물을 사용했다"는 성찰은 모두 현대 문명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제기한다. <수세미 자서전>은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서, 자연의 순환 법칙에 순응하며 사는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예술적 실험이다. /박상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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