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 끝자락의 농촌은 조용하다. 논은 잠들어 있고, 밭은 다음 계절을 기다린다. 사람의 발자국보다 바람 소리가 먼저 들리는 이 계절, 우리는 흔히 농촌의 미래를 떠올릴 때 ‘소멸’이라는 단어부터 꺼내 든다. 사라지는 마을, 닫히는 학교, 고령화라는 익숙한 진단은 어느새 농촌을 설명하는 공식이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말이 농촌의 전부일까.
전라북도 정읍시 감곡면에는 이 질문에 다른 답을 내놓는 마을이 있다. 이곳의 주민들은 기다리지 않았다. 누군가 해결해 주기를, 정책이 먼저 도착하기를, 예산이 내려오기를 바라기보다 스스로 움직였다. 농촌의 내일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감곡면의 한 마을에서 시작된 변화는 거창하지 않았다. 다만 분명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공감, 그리고 “함께 해보자”는 결심이었다. 주민들이 모여 민간 단체를 꾸렸고, 마을을 살리는 방법을 스스로 고민했다. 누군가의 지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들이 처음 손댄 것은 길이었다. 단순히 차량 통행을 위한 길이 아니라, 마을의 이야기가 흐르는 길을 만들고자 했다. 약초를 심고, 약초꽃이 피는 길을 마을마다 연결했다. 계절이 오면 꽃이 피고, 꽃이 피면 사람들이 걷고, 걷다 보면 마을을 알게 되는 길이었다. 그렇게 감곡면의 풍경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길은 곧 축제가 되었다. 매년 5월, 약초꽃이 만개하는 시기에 열리는 축제에는 전국에서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들은 단순한 관광객이 아니라, 마을의 일상과 계절을 함께 경험하는 생활인구가 된다. 작은 농촌 마을이 스스로 사람을 불러들이는 힘을 갖게 된 순간이다.
이 과정에서 눈에 띄는 점은 ‘마을 홍보단’의 존재다. 이곳에서는 외부의 설명보다 주민의 목소리가 먼저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곳을 직접 소개하고, 마을의 이야기를 스스로 전한다. 농촌이 더 이상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주체가 되는 변화다.
감곡면 횡룡마을의 변화는 학교에서도 이어졌다. 폐쇄적인 공간으로 남아 있던 학교를 마을과 연결하며, 학교와 마을이 하나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아이들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주민 모두가 드나들 수 있는 열린 학교. 배움은 교실을 넘어 마을로 확장되었고, 학교는 다시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다.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학교가 마을의 미래를 품는 공간으로 바뀐 것이다.
이 마을의 이야기는 중요한 사실을 일깨운다. 농촌의 미래는 숫자로만 계산되지 않는다. 보조금과 지원 사업이 모든 해답이 될 수는 없다. 물론 행정의 역할은 필요하다. 그러나 주민의 의지 없이 내려오는 정책은 오래가지 못한다. 감곡면의 사례는 민간의 움직임이 먼저 있을 때, 행정의 지원도 비로소 방향을 찾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제 질문은 분명해진다. 우리는 농촌을 위해 무엇을 더 줄 것인가가 아니라, 농촌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변화를 어떻게 발견하고 확산시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행정은 앞에서 끌기보다, 옆에서 밀어주는 역할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미 움직이고 있는 마을에 더 큰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농촌 정책일 것이다.
농촌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지 않다. 다만 그 미래는 기다리는 곳에 오지 않는다.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들, 스스로 길을 내는 마을에서 시작된다. 민간이 앞장설 때, 정치의 위력도 비로소 발휘된다. 감곡면의 작은 마을이 오늘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송완복(농업법인 자연가 이사장,자연치유생리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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