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인은 2016년 전국에 직업 재활시설 종사자들의 인권 감수성과 옹호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면서 발견한 것은 직업 재활설의 근무 연수가 길수록 인권 감수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2025년 한 해 동안 40여 곳을 다니며 장애인들의 사회적 인식 개선을 위한 희망 콘서트를 진행하며 달려왔다.
2026년 새해를 시작하며 우리 사회가 장애 감수성이 향상되고 학습된 무기력에서 벗어나 그 본래의 가능성대로 바라보는 사회를 기대해 본다.
벼룩은 자신의 몸보다 200배 높이 뛸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곤충이다. 그러나 이 벼룩을 단 20배 높이밖에 되지 않는 병에 가두어 놓으면 상황은 단숨에 달라진다. 며칠 동안 병 속을 박차고 오르려다 반복적으로 벽에 부딪히는 경험을 하게 되면, 벼룩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도약 능력을 병의 높이에 맞춰 조절한다. 더 이상 200배를 뛰려 하지 않으며, 20배 높이까지만 튀어 오른다. 병의 뚜껑을 열어 자유가 주어져도 벼룩은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 이미 ‘그만큼밖에 못 뛴다’는 한계가 내면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 병 속에서 태어난 새끼 벼룩조차도 똑같이 20배만 뛴다는 점이다. 본래의 능력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시도하지 않는 법을 배운 것이다. 이른바 ‘학습된 무기력’이 세대를 넘어 전해진 결과다.
이 벼룩의 이야기는 장애인이 처한 사회적 환경을 비추는 강력한 비유다. 많은 사람들은 장애를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한계로만 바라본다. 그러나 실제로 장애를 더 큰 어려움으로 만드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장벽이다. 예컨대 학교의 학습 환경, 고용시장, 이동권, 문화 접근성 등 수많은 영역에서 장애인은 보이지 않는 병 속에 갇혀 있다. 출발선부터 낮게 설정된 환경 속에서, 장애인은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펼치기 어려운 현실에 놓인다.
그리고 그 제한은 마치 벼룩에게 병의 높이를 학습시키듯, 장애인의 삶에 반복적으로 “할 수 없다”는 낙인을 찍는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비장애인 사회 역시 자신들이 설정한 낮은 기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장애인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데 익숙해진다. “도와줘야 할 대상”, “보호해야 할 존재”, “한계가 분명한 사람들”이라는 시선은 장애인의 능력 발현을 막는 또 다른 병의 벽이다. 이 시선은 제도 속에, 교육 속에, 정책 속에 깊이 박혀 다음 세대로 고스란히 전달되며 편견을 재생산한다. 사회가 만들어낸 병은 이렇게 단단해진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장애 감수성이다. 장애 감수성이란 단순한 ‘배려’나 ‘동정’의 문제가 아니다. 장애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이 만든 제약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능력이며,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의 눈높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사고의 힘이다. 이는 장애인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병의 벽을 발견하고, 그것을 낮추거나 허물기 위한 인식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는 건물의 턱은 장애인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회가 무심코 만들어 놓은 장벽 때문이다. 수어 통역이 없는 공공 서비스는 청각장애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구조적 문제이며, 발달장애인을 위한 맞춤형 학습 환경이 부족한 현실은 사회적 무관심이 만든 장벽이다. 이 모든 것이 ‘뛰지 못하는 장애인’이 아니라, ‘뛰게 만들지 않는 사회’를 드러낸다.
병뚜껑이 열린 뒤에도 높은 곳으로 뛰지 못하는 벼룩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혹시 우리는 “장애인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 정도 배려면 충분하다”는 낮은 병의 높이에 스스로를 맞추고 있지는 않은가? 더 심각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오래된 사회적 기준에 의해 ‘생각 당하고’ 있는가?
장애 감수성은 이러한 굳어진 사고의 틀을 깨는 작업이다. 장애인은 무기력하지 않다. 다만 우리가 만든 병 속에서 그 능력을 펼칠 기회를 박탈당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병을 깨기 위한 인식 변화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장애인의 잠재력을 바라보는 눈, 정책을 만드는 의지, 새로운 환경을 만드는 노력 이것이 모일 때 비로소 20배의 벽은 사라지고 200배의 가능성이 열린다.
이제 사회는 장애인의 능력을 ‘높이를 제한한 병’ 속에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 본래의 가능성대로 바라봐야 한다. 장애 감수성은 바로 그 출발점이다. 우리는 지금 선택해야 한다. 생각하는 사회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생각 당하는 사회에 머물 것인가. 병을 깨고 함께 뛰어오르는 미래는 우리의 감수성에서 시작된다.
우리 사회가 먼저 병의 뚜껑을 열고, 사회가 만든 벽을 허무는 회복의 사명을 감당 해 가기를 기도해 본다. /문성하(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 대표, 정읍 선교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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