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거리에서 정훈이 창호지로 천자문을 적은 책을 만들었다. 또, 북한에서 내려온 조선생이 상오정에서 서당을 차려 김재성의 형 또래들이 그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삼거리에서 한문을 배운 이야기는 두 가지가 전해온다.
무주 ‘무풍면지’가 생활문화사의 꽃으로 발간됐다.
6.25 이후에 상오정에 교회가 생겼다. 외지 사람들이 마을에 들어와 전도를 시작했고 새땀(상오정마을 서쪽 물 건너에 있는 동네) 끝에 나무로 종루를 만들고 사랑방에서 집례를 하는 방식으로 예배가 시작됐다. 공회당 교회가 있을 때는 구천동 사람들이 상오정에 와서 예배를 드렸다. 당시 초대 목사는 허은보 목사였다. 구천동교회가 생기면서 상오정교회는 구천동교회에 흡수됐다.
삼거리에 버스가 들어온 것은 1970년대 초반의 일이다. 1960년대 무주에서 전주까지 진안, 장수를 거쳐 비포장도로를 달리던 삼남여객이 삼거리까지 운행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엔 무주에서 구천동까지도 버스로 두 시간, 전주에서 무주 구천동까지는 여섯 시간이 걸리는 시절이었다.
상오정에 삼남여객이 운행될 때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 삼남여객 조수들이 버스 운행 안내판에 상오정을 삼오정이라고 쓰는 바람에 한때 동네 이름이 삼오정으로 알려진 때가 있었다. 이는 빼재를 신풍령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풍령은 빼재 휴게소 주인이, 빼재 옆 '심바래미' 골짜기를 한자로 신풍(新風)으로 적으면서 '배재'의 이름도 '신풍령'이 된 것 같다.
‘심바래미’는 골이 하나로 되어 있어서 평소에도 바람에 세게 부는 곳이다. '심바래미'의 '신'은 '새로울 신'이 아니라 '세(强)-+-ㄴ 바람+-이'임에도 빼재 휴게소 주인이 신풍령 휴게소'라고 간판을 내붙이면서 이곳은 지금도 신풍령으로 불린다.
삼거리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75년 무렵부터이다. 그 이전엔 방아실에서 방아를 돌리는 동력으로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썼다. 방아실 전기는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힘으로 발전기를 돌리는 방식이어서 불의 밝기가 그때마다 달랐다.
삼거리에서 우시장을 보러 갈 때는 무풍장, 안성장, 이천장, 남면장, 고제 높은다리장 등이었다. 상오정에서 무풍장을 갈 때는 기미기재(괴목령)을 넘어 무풍 한재, 은고 노구지리를 지나 무풍장으로 갔다.
경상북도로 나갈 때는 한재에서 증산, 불내, 금평, 부평을 지나 덕산재로 가는 길을 이용했다.
대덕산 장터는 옛 무풍시장(茂豊市場)으로 1918년 8월 1일 설립허가 받아 무풍면 현내리 650-6번지에서 3일과 8일의 장으로 우시장과 함께 문을 열었다. 당시 주요상품으로 곡류, 연초, 축산류,직물, 수산물, 육류, 잡화 등을 취급했으며 곡류는 김천 방면으로 이출하고 잡화같은 것은 김천에서 공급받았다.
시장 출입 상인의 행상구역은 김천(金泉), 지례(知禮), 무주(茂朱)시장 등이었다. 1965년 1월 장독을 개축했으며, 1967년에 최대성황을 이루었다. 1973년 우시장을 장옥 좌측에서 고도마을(현 주민자치센터 위) 입구로 이전했으며, 1980년 중반에는 완전히 폐쇄했다. 1982년에 장옥 5동으로 점포 30칸을 개축 정비했으나, 2003년 총사업비 23억을 투자해 대덕산 장터로 이름을 바꾸어 개장했다.
안성장에 갈 때는 설천면 심곡리 배방에서 등방, 지금의 무주리조트와 스키장이 있는 지역으로 가서 '꺼럼령[검령(劍)]'을 지나 안성장으로 갔다.
빼재를 넘어 고제 높은다리장으로 가는 길이 가장 가까운 길이었다.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에 높이 1.5m 정도의 외나무다리가 있었는데 그것이 높은 다리라 불렸다.
덕유산 마지막 표범은 1959년 3월 27일까지 살았다.
삼거리에는 서너 명의 포수가 있었다. 중오정 방앗간 주인 박상운도 그중 하나였다. 그의 총은 총글이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나는 구식 총이었다. 그런 총으로 사냥을 제대로 할 리가 없어서 동네에 박상운 '포수'라고 불렀다. 1959년 3월 27일 띵포수 박상운은, 산에서 나는 표범 소리를 듣고 표범 몰이할사람 서넛을 데리고 골짜기로 들어갔다. 덕유산 마지막 표범은 띵포수가 쏜 산탄에 눈을 맞아서 잡히게 됐다.
‘무풍면지’는 무풍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있는 무풍의 진정한 생활사라는 점이 자랑이다. 다른 면지와 다른 중요한 특징은 무풍사람들의 삶의 세절(切), 땀과 눈물의 역사를 담았다.
담배 농사 지어 자식들 가르치느라 진을 다 뺐던 어머니 아버지가 그리울 때, 시린 발을 동당거리며 모내기를 할 때 따뜻한 ‘못밥'을 내오던 이웃집 어른들이 보고 싶을 때, ’유딧고사‘ 떡 한조각 먹는 재미로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동무들이 떠오를 때, 바로 그때, 따뜻한 아랫목에서 '갱시기죽' 한 사발 먹는 기분으로, 면지 이곳저곳을 펼쳐서 그때 그 사진 속에 들어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시라.
‘신증동국여지승람’ 무풍 토성은 '심, 박, 하, 전, 주, 황' 6개 성으로 기록되지만, 현재 무풍 사람들은 무풍의 오래된 성씨와 마을을 '최하리 현철한'으로 정리한다. 성씨는 전주최씨, 진양하씨, 흥양 이씨 순, 동네는 현내리, 철목리, 한치 마을이 오래된 순서라고 한다.
무풍엔 그 못지않게 달성 서씨, 평산 신씨, 원주 이씨도 오래 전부터 무풍의 양반으로 자리잡았다.
김녕김씨, 경주이씨, 은진송씨, 해주오씨, 은진임씨, 영천이씨, 합천이씨, 함양오씨 등도 오래 전에 무풍에 입향, 서로 어울려 살았다.
나라에 환란이 있을 때마다, 이곳 무풍은 그렇게 새로운 성씨들이 유입됐고, 비슷한 심정으로 십승지지(十勝地)를 찾아온 이웃에게 무풍 양반들은 언제나 품을 내어주는 넉넉한 마음을 베풀며 무풍 양반의 품위와 인심을 세워나갔다.
정감록이 예언한 십승지 마을이 무주군 무풍이다. ‘무주 무봉산 북쪽 동방 상동으로 피란 못할 곳이 없다(茂州舞鳳山北銅傍相洞)’
조선시대 정감록이 '흉년도 없고, 전쟁도 없고, 전염병이 없었던 곳'으로 예언한 '십승지'(十勝地)가 새로운 지역 마케팅으로 떠오르고 있다.
‘삼재팔란(三災八難)’이 없는 곳을 말한다. ‘삼재(三災)’는 수재(水災), 화재(火災), 풍재(風災) 등 세 가지 큰 재난을 의미하며, ‘팔란(八難)’은 부모의 병환, 부부·자녀의 질병, 형제간의 불화, 예기치 않은 실물, 도적, 이성간의 문제, 투쟁 시비, 구설 관재 등의 근심을 말한다.
인생살이에서 발생하는 소소 재난들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출처나 해석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인간 생활 속의 어려움을 포함한다.
오지의 대명사로 불렸던 '무주구천동' 이웃에 있는 무풍은 덕유산 직전에 있는 대덕산이 감싸 안고 있다. 구천동이 아닌 무풍이 십승지인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도 있으나 구천동은 20세기 들어 개발이 되어 많이 번잡해졌지만 무풍은 여전히 그 지세를 그대로 지켜 예언가들이 이런 변화를 미리 읽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풍의 십승지 입지 조건을 보자면 서쪽으로 백두대간의 덕유산에서 삼도봉 구간, 남쪽에서 동쪽에 걸쳐서는 덕유산 연맥, 북쪽으로는 민주지산이 둥글게 에워싸고 있는 곳에 위치하여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이런 무풍을 '복지(福地)'라고 했다.
또, 택리지에 '충청, 전라, 경상 3도가 마주친 곳'에 있고, 그 중 나제통문은 신라와 백제가 치열한 영토다툼을 벌이던 곳으로 '신라 사람이자 전라도 사람'으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전라도 사람들이 살고 있기도 하다.
무풍면의 특별함은 아마도, 자녀들 교육에 온 지역 사람들이 힘을 모은 일제강점기 무풍장학계가 그 상징으로 보인다.
‘동아일보’ 1926년 2월 3일 보도에 따르면, 1925년 7월 10일 무풍공립보통학교 학부형과 무풍 지역 유지 수백 명이 무풍공립보통학교 교실에 모여 장학계를 조직했다.
무풍장학계는, 전계원이 봄에는 보리 다섯 되, 가을에는 벼 다섯 되씩 2년 동안 모았다가 그해 졸업생 가운데 성적이 양호하고 품행이 방정한 학생을 선발,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고 졸업 후에 직업을 가진 후 원금만 상환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김규남 집필위원장은 “‘무풍면지’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이렇게 사셨구나 하고, 그 사람들의 휜등을 다독이는 시간을 가져볼 만한 책이다”면서 “면지는 곁에 두고, 고향, 그리고 내 부모 형제, 내 이웃과 친구들이 그리워질 때 꺼내어 나를 형성했던 고향 무풍의 바람과 인심을 기억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책이다”고 했다.
발행처는 무풍면지 편잡위원회, 무주문화원, 진행처는 협동조합 전북지역학연구소, 기획.총괄은 김규남, 조사 집필은 김성식, 박노석, 최명표, 김규남, 편집 및 디자인은 디자인 윤슬, 출판은 윤슬이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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