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동학농민혁명 연구성과를 소개하고 있는『일본연구』23집(2001년 3월)
동학농민혁명 연구는 한국 못지않게 일본에서도 활발하다. 일본에서 동학농민혁명 연구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은 1995년 7월에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에서 전라남도 진도(珍島)출신 동학농민군 지도자 두개골(頭蓋骨)이 방치된 상태로 발견된 이른바 ‘홋카이도대학 문학부 인골방치사건’(이하, 인골방치사건)이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인골방치사건’을 계기로 1997년부터 시작된 한일 공동연구는 지금까지 약 30여 년 계속되면서 일본 각지에 남아 있는 동학농민혁명 관련 사료를 대거 발굴⬝소개하는 한편, 1세기 이상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 즉 동학농민군에 대한 일본군의 제노사이드(Genocide, 대량학살) 실상을 새로 발굴한 사료에 근거하여 구체적으로 밝혀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인골방치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 일본에서 나온 동학농민혁명 연구성과 소개는 필자의 논문(위의 사진 참조)으로 대신하며, 이 글에서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일본군의 제노사이드 실태를 극명하게 파헤친 연구성과를 요약 소개한다.
동학농민군에 대한 일본군의 제노사이드 실태 일부가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된 것은 1995년 7월 ‘인골방치사건’ 직후에 홋카이도대학 문학부에 설치된 ‘홋카이도대학문학부 후루카와강당 구표본고 인골문제 조사위원회’(北海道大學文學部 古河講堂 舊標本庫 人骨問題 調査委員會)가 2년여의 진상조사 끝에 1997년 7월에 발표한 최종보고서(最終報告書)를 통해서였다. 동 최종보고서는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제노사이드 실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홋카이도대학에서 발견된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에 관한 최종보고서(1997년 7월)
1895년 1월 21일(음력 1894년 12월 26일)에 전라남도 진도에 상륙한 일본군 및 일본 군의 지휘를 받고 있던 조선 정부군(통위영병)은 1월 25일(음력 12월 30일)까지 5일 간 진도에 주둔하면서 동학농민군 수백 명을 학살했다. 진도에서 동학농민군을 학살한 일본군은 대구가도(大邱街道) 즉 서울에서 충주를 거쳐 대구로 이어지는 동로(東路)로 남하한 후비보병 제19대대 제1중대에서 파견된 지대(枝隊)였다. 그들은 일본 히로시마 (廣島)에 설치된 대본영(大本營)의 직접 지휘에 따라 전라도 서남해 연안으로 동학농민 군을 내몰아 모조리 죽이는 이른바 ‘전원 살육 작전’을 구사했다.
1997년 7월에 홋카이도대학 문학부 인골문제 조사위원회가 공표한 최종보고서는 동학농민혁명 연구사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 보고서를 통해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이 전라남도 진도까지 남하하여 동학농민군을 학살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질 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진압이 제노사이드(Genocide) 즉 대량학살이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홋카이도대학 최종보고서가 공표된 이듬해인 1998년에 재일동포(在日同胞) 연구자 조경달(趙景達) 교수의 역작『이단의 민중반란-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이와나미서점, 1998)이 출간되었다.

『이단의 민중반란』왼쪽은 일본어판(1998), 오른쪽은 한국어판(2008)
조경달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을 “일본군이 동아시아 민중을 대상으로 자행한 제노사이드”라고 자리매김하였다.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은 청일전쟁 중에 국제적인 비난이 빗발쳤던 일본군의 ‘여순학살’(旅順虐殺)에 선행하는 학살이었다. ‘여순학살’은 1894년 11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간에 걸쳐 자행되었는데 11월 28일 영국의『타임즈』보도를 기점으로 유럽 각국 신문들이 다투어 보도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 학살은 전혀 보도되지 못했다. 일본 정부가 철저히 그 진상을 은폐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은 대본영의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1848-1899)가 1894년 10월 27일(음력 9월 29일)에 전신(電信)으로 내린 ‘전원 살육 명령’에 의해 자행되었다. 이 ‘전원 살육 명령’에 의해 학살당한 동학농민군 희생자 수에 대해 조경달 교수는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전체 희생자 수는 3만 명을 너끈히 넘는 것이 확실하다. 마지막 으로 열악한 의료 상황 때문에 상당히 많았을 것이 틀림없는 부상 후 사망자를 더하면 5만 명에 육박했을 것이다. ‘살해된 자’만 20만 명이라는『천도교창건사』의 숫자는 논 외로 치더라도 ‘피해자 30-40만 명’이라는『동학사』의 숫자는 부상자 수가 사망자 수 를 훨씬 웃돌 것임을 생각할 때 결코 근거 없는 숫자가 아니다.(박맹수 옮김,『이단의 민중반란』, 역사비평사, 2008, 329쪽)
라고 추계했다. 이 추계는 조 교수에 의하면, ‘극히 대략적인 계산’이라는 하였지만 매우 조심스러운 추계였다. 그래서 한국의 동학 연구자들은 조 교수의 추계가 너무 소극적인 추계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조 교수가 ‘사망자 수가 5만 명에 육박’할 것이라고 밝힌 것은 동학농민혁명 연구에서 통설(通說)이 되었으며, 조 교수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1998년 이후 일본군의 제노사이드 해명에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동학도⬝농민군 대탄압은 극단적으로 진행되었다. 그것은 바로 근대일본(近代日本)이 해외에서 저지른 최초의 대학살 행위였으며, 근대일본의 역사상 잊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사건이다. 제2차 농민전쟁(제2차 동학농민혁명- 주)은 조선 국토의 절반에 이르는 지역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각지의 봉기와 탄압의 상황과 특징 등은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해명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과제는 근대일본 최초의 본격적 대외침략사 해명이라는 시각에서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혁명-주)의 전모를 해명하려는 작업일 것이다.( 박맹수 옮김, 위의 책, 329-330쪽)
조경달 교수의『이단의 민중반란』은 일본에 있어 기존 동학농민혁명 연구 수준을 일거에 뛰어넘은 역작이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조 교수가 해월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동학교단 지도부, 이른바 ‘북접’(北接) 농민군의 역할에 대해 지극히 낮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조경달 교수에 이어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를 수행한 이는 바로 홋카이도대학 이노우에 가츠오(井上勝生) 명예교수이다. 이노우에 교수는 본래 일본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전공이었으나 재직하고 있던 홋카이도대학에서 ‘인골방치사건’이 일어나자 조사위원회 일원으로 참가한 것을 계기로 한국의 동학농민혁명 연구, 그중에서도 제2차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동학농민군 학살 실상을 규명하는 쪽으로 연구를 전환하였다.
이노우에 교수는 홋카이도대학 ‘인골방치사건’ 최종보고서를 집필하였고, 최종보고서 발표 이후에는 동학농민군 진압 전담부대였던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병사들의 출신지인 시코쿠(四國) 4개 현에 대한 현지 조사를 바탕으로 동학농민군에 대한 일본군의 제노사이드 실태를 해명하는 작업에 진력하였다. 그리하여 2001년에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잡지『세카이』(世界) 2001년 10월호에「일본군에 의한 최초의 동아시아 민중학살」을 발표하였다.(아래 사진 참조) 이 논문은 일본의 동학농민혁명 연구자는 물론이고 일본 지식인 사회에 놀라운 반향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100년 이상 감춰졌던 진실이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세카이』693호(2001년 10월호) 목차에 나오는 이노우에 교수의 논문
2001년 이후,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 즉 제노사이드 실상에 관한 이노우에 교수 연구는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기존 연구를 뒤집는 놀라운 성과로 이어졌다. 여기서는 주요 업적 소개에 그치기로 다음 호에서 자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2004년 9월「탄압의 기억-갑오농민전쟁과 에히메」상하(『에히메신문』)
2010년 1월「동학농민군 포위섬멸작전과 일본정부⬝대본영」(『사상』1029호)
2013년 6월『동학농민전쟁과 일본- 또 하나의 청일전쟁』(코분켄 출판사)
/박맹수(원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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