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오년 적토마의 활력 담다

-2026년은 병오년(丙午年) ‘말의 해’; 관우의 적토마, 이성계의 용등자와 발전자

기사 대표 이미지

2026년은 병오년(丙午年) ‘말의 해’다. 12지의 일곱 번째 오(午)에 해당하는 말의 상징성은 무엇일까. 2026년은 60간지의 43번째에 해당한다. 붉은색과 불의 기운을 지닌 '병'(丙)과 말을 상징하는 '오'(午)가 만나 '붉은 말의 해'라고도 부른다. 불(火)의 기운까지 가진 붉은 색 말이라 양의 기운이 강해 새해에는 활력이 넘칠 거라고 말한다. 말의 해는 갑오-병오-무오-경오-임오로 순행한다. 갑은 파랑, 병은 빨강, 무는 노랑, 경은 하양, 임은 검정을 상징해서 말의 해가 되면 말 색깔이 각각 표현된다.



△ 남원 관왕묘 관우의 적토마



적토마(赤兎馬)는 온몸이 빨간색 털로 뒤덮인 말로 '삼국지', '후한서', '삼국지연의' 등에 등장한다. '삼국지연의' 에 등장하는 적토마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는 명마이다.

처음에는 여포가 탔으나 조조의 손에 들어갔다가 조조가 관우에게 선물하여 관우가 주로 타고 다녔다고 한다.

남원 관왕묘 안에 걸려 있는 적토마도(전라북도 유형문화유산)'는 가로 254cm, 세로 339cm 크기의 작품이다. 마부가 적토마의 고삐를 잡고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말과 인물의 모습이 정교하고 섬세할 뿐만 아니라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탱화의 뒷면에 개국 527년(1918) 조형하가 감독하여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 탱화가 19세기 말 이전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회화사를 연구하는데 의미있는 자료로 예술적 가치가 있고 조선후기 민간 신앙인 관성신앙과 관련된 민속자료 보존가치가 인정된다.

남원 관왕묘는 중국 삼국시대의 이름난 장군인 관운장의 위패를 모시고 제를 올리던 곳이다.

임진왜란(1592) 당시 원정을 왔던 중국 명나라 장군이 자신들의 수호신인 관우를 모시기 위해 선조 31년(1598)에 남원부 동문 밖에 세웠다. 지금 있는 자리는 영조 17년(1741)에 옮긴 것이고 해마다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 이성계의 용등자와 발전자



나폴레옹엔 백마가 있었다면, 이성계엔 여덟 준마가 있었다. 다비드(Jacques-Louis David)가 그린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백마를 타고 알프스 너머를 가리키며 군대를 이끄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넘치는 힘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앞 다리를 들고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말의 모습은 나폴레옹의 영웅적 면모를 더욱 강조한다.

나폴레옹의 그림처럼 말을 탄 군주의 모습은 군주의 권력을 과시하는 상징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고대로부터 말을 권력자, 특히 천자(天子)와 연관 짓는 관념은 동서양에 공히 나타났다. 특히 중국에서는 왕조 교체기에 창업주를 도와 활약한 말이 건국의 중요한 상징으로 종종 등장했다.

은(殷)나라의 주(紂)왕을 제압하고 주(周)나라를 세운 무(武)왕, 아버지를 도와 당(唐)나라 건국에 무공을 세운 태종(太宗)의 활약 속에 등장하는 말은 그 전형이다.

여기서 말은 주인과 함께 전장을 누비며 난세를 평정하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데 공적을 세운 존재들로 묘사됐다.

이성계의 팔준마(八駿馬)는 중국 주나라 목왕이 사랑하던 팔준마인 화류·녹이·적기·백의·유륜·거황·도려·산자와 비교된다.

조선 왕조 창업의 역사를 칭송하여 기록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 태조의 말에 대한 내용을 처음 확인할 수 있다.

용비어천가 제69장은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것을 당 태종의 업적에 빗대 칭송했다.

태종에게 ‘여섯 마리 준마’(六駿)가 있었다면, 태조에게는 여덟 마리의 준마가 있어 창업의 위업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고 했다. 이를 시작으로 태조가 탔던 말을 곧 조선 왕조 건국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문법이 만들어졌다.

용비어천가 30장에도 태조의 말 이야기가 실려 있다. 청년 태조가 장단(長湍)에서 사냥을 할 때 ‘오명적마(五明赤馬)’를 타고 높은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고개 아래는 낭떠러지였다. 이때 갑자기 노루 두 마리가 튀어나와 달아나자 태조는 말을 달려 노루를 쫓아갔다. 기어코 화살을 명중시켜 노루를 쓰러트리고는 급히 말머리를 돌려 멈췄는데, 절벽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거리였다.

사람들이 기예에 가까운 태조의 솜씨에 탄복하자, 태조가 웃으며 “내가 아니면 멈출 수 없다”고 자부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임금이 될 사람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재로 활용됐다.

여기에 등장한 ‘오명적마’가 팔준의 하나인 ‘발전자’다.

오명적마는 코와 네 발이 모두 흰 붉은 색 말을 의미한다. 그 모습이 발전자의 용비어천가 69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모습과 꼭 닮아 있으며, 장단에서 사냥을 할 때 탔다는 기록과도 일치한다.

이성계의 말들은 흔히 ‘팔준(八駿)’으로 알려져 있다. 횡운골(橫雲&;), 유린청(遊麟靑), 추풍오(追風鳥), 발전자(發電&;), 용등자(龍騰紫), 응상백(凝霜白), 사자황(獅子賞), 현표(玄約) 라는 이름의 여덟 마리 말이 바로 그것이다.

팔준마 중 두 마리의 붉은 말이 있었으니 곧 발전자(發電&;)와 용등자(龍騰紫)다. 발전자(發電&;)는 이성계가 수렵할 때 타던 말이다. '번개를 내뿜는 붉은 말'이란 신화적 뜻을 지녔다.

용등자(龍騰紫)는 이성계가 해주에서 왜적을 물리칠 때 탔던 말이다. '용이 날아오르는 듯한 자주색 말'이라는 뜻이다.

횡운골(橫雲&;, 홍건적을 물리친 여진산 명마로 '구름을 가로지르는 송골매를 닮은 말'이란 뜻), 유린청(游麟靑ㆍ왜구를 물리쳤던 함흥산 명마로 '기린처럼 노니는 푸른 말'이란 뜻), 추풍오(追風烏ㆍ여진산 흑마로 전쟁터에서 화살 한 발을 맞은 적이 있는 역전의 용사인데 '바람을 쫓아가는 까마귀'란 의미), 발전자(함경도 안변 출신의 말로 '벼락을 내뿜는 붉은 말'이란 뜻),

용등자(龍騰紫ㆍ해주에서 왜구를 물리친 단천 출신의 말로, '용이 날아오르는 듯한 자줏빛 말'이란 의미), 응상백(凝霜白ㆍ위화도 회군 때 탔던 제주도 말로 '서리가 응결한 듯한 흰 말'이란 의미), 사자황(獅子黃ㆍ지리산에서 왜구를 물리쳤던 강화도 말로 '사자처럼 사나운 황색마'란 뜻), 현표(玄豹ㆍ왜구를 떨게 했던 함흥산 명마로 '검은 표범'이란 뜻) 등이다.

임금님이 타고 다니는 말을 어승마라고 한다.

제주의 “어승생(御乘生)이-오름”에서 노정(蘆正)이란 어승마가 태어난 사실은 잘 알려졌지만 조선 태조의 명마 응상백(凝霜白)에 대한 내용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응상백이란 말은 서리가 엉켰다는 뜻이니 곧 백마를 지칭한다.

팔준마(八駿馬) 중 하나의 말이 응상백인데 이 이름을 줄여서 응백(凝白)이라고 불렀다.태조와 함께한 말들은 생산지를 3곳으로 나눌 수 있다, 함경도와 강화도 제주도의 남부·여진이다.

팔준마 중 함경도 출신의 말은 유린청, 발전자, 용등자, 현표로 그 중 절반인 4마리나 된다.

이것으로 볼 때 고려말 조선시대 초기만 해도 한반도에는 북방의 기마민족과 대적할 수 있는 말들이 다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함경도는 조선 왕조를 창업한 태조 이성계와 그의 선조가 살았던 곳으로, 왕업의 터전을 닦은 왕실의 고향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재세 1335~1408년, 재위 1392~1398년)는 고려 말의 뛰어난 무장이었다.

공민왕을 도와 원(元) 세력을 축출하는데 일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혼란 속에 흥기하였던 홍건적과 여진, 왜구의 침입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난세의 혼란에 혁혁한 승리를 쌓아간 실질적인 영웅이었다. 그가 승리를 일궈낸 전장을 함께 누빈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그의 말들이었다. 팔준도라는 그림에서 표현된 말은 자태와 이름, 그리고 그 뜻과 활약상으로 볼 때 과연 신화적 명마다운 기품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태조의 말들은 왕조 창업의 역사를 칭송하기 위한 상징만은 아니었다. 그의 말들은 실제 태조와 함께 수많은 전장에 나가 몸에 화살을 맞아가며 승리를 일궈냈던 전우였다.

용비어천가를 비롯, 태조의 팔준에 대해 쓴 문헌에는 태조의 말들이 전장에서 맞은 화살 개수가 훈장처럼 기록되어 있다.

횡운골(橫雲&;)은 태조가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ㆍ?~1388)를 쫓아내고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할 때에 탔다고 하는데 전장에서 화살 두 발을 맞았다. 유린청(遊麟靑)은 태조가 오녀산성을 차지했을 때와 해주ㆍ운봉 등지에서 왜구를 상대로 승전할 때에 탔던 말로, 역시 세 발의 화살을 맞았다. 추풍오(追風烏)와 용등자(龍騰紫)도 전장에서 각각 화살을 한 발씩 맞았다.

전장에서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며 승리를 태조를 승리로 이끈 말들이었던 만큼 이들의 존재는 각별했다. 그중에서도 유린청은 태조에게 더욱 특별한 말이었다고 전해진다.

태조는 유린청이 여섯 살일 때부터 이 말을 타기 시작해서 서른한 살에 죽을 때까지 25년의 세월을 함께 했다. 1370년 공민왕이 요동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이성계를 출정시켰을 때 함께 한 것도 유린청이었다. 이때 이성계는 화살 70여발을 쏘았는데, 모두 적군의 얼굴에 명중시켜 군사들의 사기를 크게 올렸다. 그 결과 오녀산성을 차지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으니, 유린청도 이러한 대승을 옆에서 지켜보았을 것이다.

유린청의 가슴 오른쪽, 왼쪽 목덜미와 오른쪽 볼기에는 전장의 상처가 남아 있었다. 유린청이 죽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슬퍼했다고 하며, 석조(石槽)를 만들어 묻어주었다. 태조는 왕위에 오르고 난 뒤 여덟 마리 중 노령의 말 두 마리는 놓아 보내주었다고 한다.

이는 주나라 무왕이 천하를 평정한 뒤 해산하면서, 무공을 세울 때 동원했던 말은 화산 남쪽 기슭으로 돌려보내고, 소는 도림(桃林)의 들에 풀어 놓아 다시 쓰지 않을 것을 온 천하에 보였다는 고사를 따른 것이다.

창업주 태조의 업적을 재평가하고 그의 자취를 기념하는 일은 왕실의 정통성을 세우는 데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었으며, 창업의 역사를 지키고 계승해 나갈 자기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를 통해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국왕의 권위, 왕실의 위엄을 강조하고자 할 때 창업주 태조와 그의 팔준도가 효과적인 정치적 상징으로 지속적으로 소환됐음을 알 수 있다./이종근기자





전북을 바꾸는 힘! 새전북신문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