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말의해 맞아 마로덕과 잉골드를 기억해야

이종근 문화교육부장

내년 2026년은 병오년(丙午年) ‘말의 해’다. 12지의 일곱 번째 오(午)에 해당하는 말의 상징성은 무엇일까. ‘붉은 말(赤馬)’의 해다. 말은 거침없는 활력과 에너지의 상징이다. 말의 해을 맞아 전북 사람들이면 마로덕(1873∼1960) 선교사와 의사 마티 잉골드(Dr. Mattie, B. Ingold, 1867∼1962)를 기억해야 한다. 이들은 말을 타고 선교를 하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했기 때문이다.

전주 예수병원 설립자인 마티 잉골드가 말을 타고 왕진 가는 사진(1898)이 눈길을 끈다. 1898년 잉골드 여사가 말 타고 왕진 하는 모습은 그 앞에 2명의 사람이, 또 말을 타고 가는 그녀의 모습뒤로 2명의 사람이 등장한다.

예수병원의 역사는 1898년 11월 3일, 미국 북부에서 온 여의사 마티 잉골드(Mattie Ingold)에 의해 시작됐다. 어렸을 때부터 선교사의 꿈을 키워 온 그녀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뒤 5년 동안 기도하며 자신의 선교지를 주님께 물었다. 그리고 마침내 30세가 되던 해인 1897년, 한국이야말로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역지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록힐 제일장로교회에서 선교사 파송 예배가 있던 날 잉골드는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내가 한국 전주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옳고 선하심을 믿기 때문에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미국을 출발한 마티 잉골드는 4개월에 걸친 길고 험난한 항해 끝에 전주에 도착했다. 그리고 전주 성문 밖 은송리에 허름한 초가삼간 한 채를 구입하고 동네 어린이와 여자들을 진료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예수병원의 시작이다.

남녀 구별이 엄격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여자 환자뿐이었으나 아내의 치료를 위해 왔던 남자들이 하나둘 진찰을 받게 되면서 서서히 ‘용한 미국인 여의사’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05년 잉골드는 당시 전주선교부 소속 선교사였던 루이스 테이트(Lewis B. Tate, 한국명 최의덕)와 결혼했다. 루이스 테이트는 전주 선교의 개척자이며 전주 서문교회와 김제 금산면에 있는 금산 ‘ㄱ’자 교회를 설립한 인물이다. 결혼 후 잉골드는 진료소를 사임하고 남편과 더불어 농촌 선교에 전력하는 한편, 여성의 성경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평생에 걸친 그녀의 헌신, 그것은 다음과 같은 깊은 감사에서 우러나왔다. “내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줄 수 있게 하옵소서.”

일생을 전라도 땅에 바치기로 하나님과 굳게 약속을 했지만 남편 최의덕 선교사 혼자 미국으로 보낼 수 없어서 그도 1925년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부부가 전주를 떠날 때까지 그는 28년간 한국 선교에 온 힘을 기울였다. 미국 1등 국가의 의사면허증을 갖고 온 잉골드 선교사는 모든 선교사뿐만 아니라 전라북도 도민들의 꿈을 이뤄 주었다.

‘어찌하여 이름이 마로덕이던가(何如作名馬路德), 올라탄 말 재촉하며 포교하러 다닌 덕이리라(促馬行路布敎德). 머나먼 길 바다 건너 여기에 와 삼십 총각 전주에 몸을 맡겼네. 예수 복음 천지를 뒤흔드니 유생 학자 묘 속에서 뛰어나와도 밝은 종교 모인 민중 받아들였으니 호남의 목자들 오래 떠받들리라'’

전북 동남부의 산악지대를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해 무려 80여 개의 교회를 개척한 마로덕(馬行德)의 위대한 자취는 세상을 떠난 지 60여년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전설로 남아있다. 마로덕 선교사라 부르는 루터 올리버 맥커친(Luther Oliver McCutchen)은 미국 남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나 데이비슨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버지니아의 유니온 신학교와 콜롬비아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건너와 1903년 전주에 오게 됐다. 그는 주로 전북의 동남쪽을 선교지로 삼아 활동했다. 그는 동부 산악지역을 말을 타고 다녔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마로덕(馬路德)이었다. 말을 타고 길을 돌아다닌 덕분에 많은 선교를 할 수 있었다는 뜻이라 했다.

서원로가 개설되기 전에는 중화산동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은 높고 꼬불꼬불한 강당재였다. 강당재는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한 채 그대로 남아 있다. 바로 이곳에 그의 기념관이 자리한다.

그는 말을 타고 소양을 지나 높은 위봉고개를 넘어갔다. 그곳은 전국적으로 오지로 소문난 동상면이었다. 위봉폭포 부근에서 위봉교회를 세운 그는 학동교회, 수만교회, 신월교회를 연이어 설립했다. 그때가 1905년에서 1907년 사이였다. 위봉교회 인근의 소농교회와 봉동의 덕천교회 등도 그가 세웠다.

전주남문교회는 1905년 전주서문교회에 출석하던 마로덕 선교사와 최국현 장로, 강견대씨 등 20여명이 중심이 되어 창립됐다. 전주 남문교회엔 종탑과 종이 남아있다. 남문교회의 1대 당회장인 마로덕은 일제강점기 노회 시절 당시에 주요 개척한 교회들에 같은 종을 만들어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종은 대구에서 가져왔다고 전한다. 봉동의 덕천교회 종도 그가 기증했다. 일제말 공출로 빼앗기지 않으려고 교회 장로가 숨겨 놓았다가 해방 후에 종탑에 걸어놓았다. 종두(鐘頭)가 없이 종만 걸려 있다.

하지만 전주 남문교회 종은 종두가 있어 줄로 잡아당겨 종을 치고 있다. 일제가 종을 공출해 갈 때 빼앗기지 않으려고 종을 떼어 보관해 놓았던 교회들은 종두가 사라지고 나중에 종만 유물로 걸어놓았다. 이로 보면 남문교회 종은 공출의 화를 피하지 못하고 해방 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일본 경찰서가 전주 중앙초등학교에 있어 수탈의 손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리라. 해방 후 종의 유래를 알고 마로덕 목사의 성원에 감사하며 현재의 위치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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