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중 말날에 장을 담그면 맛있다

-[ 병오년(丙午年) '말의 해', 전북의 말 민속을 알아보니]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상징사전 '말' 편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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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재 화백의 말그림

국립민속박물관은 2026년 병오년(丙午年) '말의 해'를 맞아 한국 민속문화 속 말의 상징과 의미를 정리한 한국민속상징사전 '말' 편을 펴냈다. 이번 사전은 말의 생태를 비롯해 설화와 신앙, 민속놀이, 교통, 지명, 관용어, 유물과 회화 등 일상문화 전반에 나타난 말 문화를 218개 표제어로 정리한 종합 해설서다. 백마·천마·용마 등으로 불리며 하늘과 인간, 이승과 저승을 잇는 존재로 여겨졌던 말이 생명력과 지혜, 충성의 상징으로 인식돼 온 과정을 담았다. 이 사전 속의 전북 이야기를 소개한다.



△전북, 말날을 ‘마날’ 또는 ‘오날’이라 불러

마구간 고사는 10월의 무오일戊午日에 가장 많이 지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와 ‘경도잡지(京都雜志)’에 의하면 무오(戊午)의 무(戊)가 무(茂)와 음이 같으므로, 이날 말고사를 지내서 말의 번성을 기도했다고 한다. 한편, 병오일(丙午日)에는 병오(丙午)의 병(丙)과 병(病)이 음이 같으므로, 말이 병들까 두려워 이날에는 마구간 고사를 지내지 않았다.

10월의 말날 마구간에서 고사를 지내는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말날 풍속은 지역마다 큰 편차가 없다. 팥떡을 하여 마구간 앞에서 고사를 지내거나 토주단지의 곡물을 새 곡물로 갈고 비는 것이 보편적인 풍속이다. 전북특별자치도에서는 말날을 ‘마날’ 또는 ‘오날’이라 부른다. 이날은 ‘말이 살찐다’라고 하며 햇곡식으로 음식을 장만하여 조상굿을 하기도 한다. 또한 조상단지, 철륭단지, 성주단지, 삼신단지의 곡물을 새 곡물로 갈아 넣고 빈다. 이날 “도신찾는다”라고 하여 성조를 모시는 경우도 있다.



△ 전북 정월 중 말날에 장을 담그면 맛있다고 여겨

상오일(上午日)은 정초(正初) 십이지 일의 하나로 ‘첫 말날’이라고도 부른다. 말날에는 소와 함께 중요한 가축으로 여겨진 말에게 제사를 지내고 찬(饌)을 주어 위로했다. 또한 이날에는 장 담그는 일이나 고사 지내는 일 등을 했는데, 말날에 된장 담그는 일은 전국 공통의 풍속이다.

전북특별자치도에서도 정월 중 말날에 장을 담그면 맛있다고 여겼다. 이 시기에는 소금을 덜 넣어도 장이 잘 된다고 믿으며, 정월에 담그지 못하면 3월 말날에 담근다. 제주특별자치도에서는 ‘정불굴수(井不窟遂)’라 하여 말날에 우물을 파지 않았고, 전라남도에서는 말날을 길일로 여겨 고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성계와 격구

격구(擊毬)는 말 위에서 장시라는 긴 채를 이용, 공을 쳐서 상대의 구문에 넣어 승부를 겨루는 무예적 성격의 승부놀이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뛰어난 격구술을 지녔으며, 특히 조선 건국 이전에 함흥의 잠저(潛邸) 시기에 함흥 남쪽 바닷가 평지에서 수시로 격구를 즐겼다. 이로 인해 후대에 이곳 수령이 그곳에 격구정이란 정자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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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청문 명인의 판화



△ 북한에 전하는 이성계와 말 이야기

이성계가 자신의 용마와 함께 산에서 무예를 연마하던 중 섣부른 판단에 자신의 활보다 먼저 온 말을 실수로 죽였다고 하는 내용의 이야기이다.

말과 관련된 이성계 이야기는 현재의 함경남도 함흥시에 전승되고 있다. 이성계가 산에서 말을 타고 달리며 무예를 연마하던 중 섣부른 판단으로 자신의 화살보다 먼저 온 말을 실수로 죽인 후에 후회하며 제사를 지내 주었다는 내용으로 나타난다.

‘이성계와 말’ 이야기는 현재의 함경남도 함흥시에 해당하는 함흥군 함흥읍 설화로, 임석재 편집본인 ‘한국구전설화’(1987) 함경남도편에 ‘이성계와 용마’라는 제목으로 전한다.

함흥(咸興) 반룡굴의 한 비각은 이성계가 활쏘기와 말타기 연습을 하던 곳이었다. 이성계는 함흥 연포(連浦)의 송정(松亭)에 용마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잡아서 타고 돌아와 말타기 연습을 했다. 이성계는 말에게 ‘송정에다 활을 쏠 테니 그 화살보다 먼저 도착하라’고 했는데, 송정에 와 보니 소나무에 화살이 하나 박혀 있었다. 이에 이성계는 용마의 목을 쳤다. 하지만 이성계가 용마의 목을 치자마자 화살이 날아왔다. 아까 것은 전날에 쏜 화살이었던 것이다. 이성계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후회하며 용마를 제사 지내 주었다.

‘이성계와 말' 이야기는 북한 지역 건국시조에 관한 설화에 해당한다. 이성계의 조선 창업과 관련된 북한 지역의 이성계 설화는 용신(龍神) 퇴치와 관련된 적지(赤池) 지명 설화, 누르하치와 관련된 풍수발복 설화, 활쏘기를 연습하다 말이 활보다 늦게 온 것으로 착각하고 죽여 버리고 나자 활이 날아왔다는 장수 설화 등 세 가지 유형으로 존재한다. ’이성계와 말‘ 이야기는 이 중에서 장수 설화 유형에 해당한다. 적지 전설에 동원된 용신 퇴치는 고려의 건국조인 왕건 전설에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풍수발복담은 건국조의 탄생담을 구성하는 데 대응한다. 또한 이성계와 말 이야기처럼 말과 관련된 장수 훈련담은 견훤설화에서 볼 수 있듯이 창업주와 관련된 설화에서 흔히 등장한다.

북한 지역이 탄생시킨 조선의 건국시조 이성계에 관한 신성관념이 이성계 전설의 긍정적인 향유 양상을 불러온 지역적인 원인으로 작용하는 가운데 ’이성계와 말‘ 이야기도 이성계에

관한 북한 지역의 건국시조 설화의 일종으로 전승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성계의 출생지가 '이성계와 용마'의 전승지인 함경남도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북한 지역이 탄생시킨 조선의 건국시조인 이성계에 관한 신성관념이 이성계 전설의 긍정적인 향유 양상을 가져온 지역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성계와 말‘ 이야기는 조선의 건국시조인 이성계에 관한 북한 지역의 건국시조 설화의 일종으로 전승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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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의 치마대 이야기가 소개된 운수지



△ 부안 죽막동(竹幕洞) 마상(馬像)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죽막동은 풍어와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모시는 수성당(水聖堂)이 있는 곳이다. 이 당집은 변산반도 앞 칠산바다를 수호하는 할머니(개양할미)와 딸 여덟 자매를 함께 모시는 해신당인데, 개양할미가 마고할미의 능력을 지닌 거인 여성이고, 철마를 타고 왜구를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죽막동은 국립전주박물관이 1992년에 학술조사로 발굴·조사하면서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마상 유물은 모조품류 중 토마류 10여 점이며, 이 토마에는 X자형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출토된 토마의 용도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되고 있다. 첫째, 토마는 잡귀를 물리치기 위해 제당의 나무에 매달았다는 것이다. 도서 지역에서 흔히 도깨비를 쫓기 위해 대문에 말의 피를 바르는 풍속이 있고, 묘역 주변에 말 모양의 모조품을 장식하거나 고분에서 출토된 토마가 무덤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들은 말이 잡귀를 물리치는 역할을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죽막동의 토마는 몸체에 매단 흔적이 없어 잡귀를 물리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둘째, 토마가 희생 제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죽막동의 토마에는 가위를 연상시키는 X자형의 무늬가 있고, 이로 보아 말을 희생 제물로 사용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무속에서 치병굿을 할 때에는 환자의 머리에 바가지를 씌우고, 무당이 잡귀를 쫓기 위해 칼로 내리찍는 행위를 한다. 또한 도서지역의 당제에서 제물로 올린 돼지머리에 부엌칼을 꽂아 두는 곳도 있는데, 이때 칼은 잡귀를 쫓기 위한 의례적 도구로 쓰인다. 따라서 희생 제물인 말의 엉덩이에 가위 문양을 새긴 것도 잡귀를 쫓기 위한 의례적 의미였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제물은 일상적이면서 깨끗하고 음복할 수 있는 것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고대로부터 말의 국가적인 정책과 말고기 식문화를 보더라도 토마를 희생 제물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고민해 볼 여지가 있다.

셋째, 토마가 신체로 사용되거나, 신승물(神乘物)인 봉헌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말을 영험한 동물로 인식하고, 삶과 죽음의 세계를 왕래할 수 있는 존재이자 신들의 교통수단으로 인식해 왔다. 그래서 말이 죽으면 식용으로 사용하지 않고 무덤을 만들어 매장해 주기도 했으며, 공동체 신앙에서는 말을 신체로 모시거나 신승물로 봉헌한 경우가 많았다.

이런 점에서 죽막동의 토마는 신승물로 제당에 봉헌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죽막동 제사 유적의 인근 주변 당제에서 장군신을 봉안하고 있으며, 칠산바다를 끼고 있는 전남 영광군 낙월면 안마도 당제에서 철마를 제당에 봉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죽막동 제사 유적에서 석제 모조품 중 유공원판(有孔圓板)의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는데, 이 유물은 일본의 제사 유적에서도 많이 출토된다는 점에서 시사점을 갖게 한다. 특히 일본에서 신이 교통수단으로 사용하는 특별한 말을 신마(神馬)라고 부르고, 신사에서 제사를 지낼 때 신마를 봉납(捧納)하는 경우가 많다.

죽막동의 토마에는 말의 등에 안장과 장니(障泥)를 얹은 흔적이 보이고, 기타 마구의 부속구를 장식한 흔적이 나타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죽막동의 토마는 교통수단으로서 신승물로 봉헌되었고, 장군신의 신체로서 봉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부안 죽막동 마상 토마는 한국의 제사 유적에서 출토된 최초의 유물로서 문화적인 가치가 크다. 그리고 토마는 장군신의 교통수단이나 혹은 신체의 상징물로서 제당에 봉헌된 것이 특징이고, 한국의 마馬신앙을 비롯하여 일본의 제사 유적과 비교 연구할 수 있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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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장군의 치마대 이야기가 전하는 용성지



△ 진안 마이산(馬耳山)

마이산(馬耳山)은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진안읍 단양리와 마령면 동촌리 경계에 있다. 이 마이산은 중생대 백악기 지각 작용으로 퇴적층이 암석화된 후에 융기한 것으로, 두 개의 산봉우리와 10여 개의 작은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두 개의 산봉우리는 암마이봉(687.4m)과 수마이봉(681.1m)으로 불린다. 마이산은 1979년 전라북도 도립공원, 1983년 전라북도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고, 2003년 국가지정 국가유산 명승으로 승격 지정됐다.

마이산은 시기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신라는 마이산을 경주의 서쪽에서 가장 이로운 산이라 여겨 ‘서다산(西多山)’으로 부르고,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다. 고려는 하늘로 용솟음치는 기상이 있다고 해서 ‘용출산(涌出山)’이라 불렀다. 조선 초기에는 속금산束金山으로 불리다가 태종(太宗) 때부터 마이산이라 불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는 ‘용출봉(涌出峰)’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마이산은 계절에 따라 다른 이름을 지닌다. 봄에는 바다에 떠 있는 배의 돛대와 닮았다고 해서 ‘돛대봉’, 여름에는 하늘로 치솟는 형상이 용의 뿔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용각봉(龍角峰)’, 가을에는 단풍과 바위의 형상이 말의 귀처럼 보여 ‘마이봉(馬耳峰)’, 겨울에는 하얀 눈 위에 솟은 봉우리가 붓과 같다고 해서 ‘문필봉(文筆峰)’이라고 불렀다.

마이산은 특이한 형상으로 인해서 다양한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다. 이야기는 단순 지명유래에서부터 전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중 진안군 사람들은 마이산을 ‘솟금산’ 혹은 ‘속금산’으로 불렀다. ‘솟금산’과 ‘속금산’은 부르는 발음이 비슷하지만, 명칭에 따른 이야기는 차이를 보인다.

‘솟금산’과 관련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솟금산은 남편과 아내 관계인 부부봉(夫婦峰)이다. 부부는 솟아오를 시간을 상의한다. 남편은 사람이 없는 밤을 제안하고, 아내는 어두운 밤은 무서우니 새벽에 솟아오르자고 한다. 남편은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여 새벽에 솟아오르기로 한다. 이후 남편과 아내가 새벽에 솟아오르는데, 인근 마을에 사는 (임신한)여성이 솟아오르는 산의 장면을 목격하고 놀라서 소리를 지른다. 이에 부부봉은 부정을 타게 되어 더 이상 솟아오르지 못하고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남게 된다. 남편 솟금산은 더 솟아오르지 못한 것이 분한 나머지 새벽에 솟아오르자고 제안한 아내 솟금산에게 화를 내며 아이들을 빼앗고 발로 차 버린다. 그래서 솟금산은 현재와 같은 모습을 하게 된다.

이런 ‘솟금산’ 이야기는 작은 변화를 보이며 다양한 변이형이 전승된다. 즉 남쪽에 있던 부부산이 서울로 가다가 진안에 사는 여성에게 발각되어 지금 자리에 멈췄다는 이야기, 솟금산이 유명한 산이 되기 위해서 서울로 가다가 인간에게 목격되어서 실패했다는 이야기, 솟금산이 제대로 솟아올랐으면 진안이 서울이 되었을 것이라는 지역 사람들의 바람이 담긴 이야기 등이 전해지고 있다.

속금산 이야기는 솟금산 이야기와 전혀 다른 내용으로 전승된다. 속금(束金)에는 ‘금(金)의 기운을 묶는다’라는 의미와 ‘황금으로 두른다’라는 의미가 있다. 두 의미 모두 이성계의 조선 건국과 관련이 있다.

먼저, ‘금의 기운을 묶는다’라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이성계는 조선 건국을 허락받기 위해서 전국의 명산을 돌면서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마이산이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반대한다. 이에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후 마이산의 강한 ‘금金’ 기운을 누르기 위해서 ‘속금산’이라 부른다. ‘황금을 두른다’라는 의미의 ‘속금’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고려 장수 이성계가 남쪽의 왜적을 토벌하고 서울로 되돌아갈 때 마이산 산신이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서 금척(金尺)을 준다. 이성계는 한반도를 자로 재듯 잘 다스리라는 의미로

마이산 산신이 금척을 준 것이며, 조선 건국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에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후에 관료들에게 마이산을 황금 비단으로 둘러 주라고 명한다. 그러자 관료들이 “많은 양의 황금 비단을 구하기 어려우니 대신 산 이름을 ‘속금(束金)’이라 부르자”라고 제안했으며, 이성계가 이를 받아들인다.

마이산은 후대에 붙여진 지명이다. 단순 지명유래담은 마이산이 말[馬]의 귀[耳] 형상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단순 지명유래담에 이야기를 덧붙여 지명전설을 만들어서 전승했다. 그래서 마이산 지명전설도 다양하게 전해진다. 우선 태조 이성계가 금의 기운을 막기 위해서 붙인 ‘속금산’을 태종 이방원이 ‘마이산’으로 고쳐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 사람들이 산의 형상이 ‘말의 귀’와 같다고 해서 ‘마이산’이란 지명을 붙였다는 내용이다.

마이산은 ‘말의 귀’를 닮아서 붙여진 지명이다. 마이산은 산세가 특이해서 과거부터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솟금산과 속금산 이야기는 지역 사람들의 집단의식이 투영되어 신화와 역사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마이산은 솟금산과 속금산보다 비교적 후대에 붙여진 지명으로 추정된다. 마이산 이야기는 단순지명에서 지명유래담, 지명전설이 어떻게 변화되어 지역 사람들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형성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 텍스트이다.



△ 견훤, 치마대 전설 속 장수로 등장

전국적으로 분포된 ‘말무덤설화’는 일반적으로 무명의 장수와 결부된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연관 있는 실존인물인 흑치상지, 견훤, 최영, 이성계를 비롯하여 많은 유명한 장군들과도 결부되었다. 그리고 의병장인 곽재우, 김덕령이나 왕에게 반역하였던 정여립, 이몽학, 이괄과 같은 거의 모든 장수들의 수련기 과정에서 나타난다.

‘치마대(馳馬臺)전설’의 증거물로 등장하는 이 전설은 지명유래담으로 등장한다.

치마대(馳馬臺) 전설 속 장수는 대개 무명(無名)이지만, 이성계(李成桂)·견훤(甄萱)·흑치상지(黑齒常之)처럼 역사적 인물로도 등장한다.

그중 견훤을 주인공으로 하는 전설에서 용마 모티프가 가장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견훤이 후백제의 왕이 되기 전에 매일 무예를 닦았는데, 다만 한 가지 고심은 군마(軍馬)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견훤은 바위 속에서 뛰쳐나오는 한 마리 용마를 본다. 견훤은 크게 기뻐하며 용마의 고삐를 잡고 “내 장차 후백제를 세울 몸이다. 장수 나자 용마 난다고 하니, 활을 쏘아 네가 화살보다 빠르면 나와 일생을 같이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네 목을 칠 것이다”라고 말하며 속도를 겨루는 시합을 벌였다. 그러나 견훤이 용마를 타고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화살이 보이지 않자, 견훤은 용마가 화살보다 느렸다고 여기고 칼을 뽑아 용마의 목을 내리쳤다. 그런데 용마의 목이 떨어지기도 전에 화살이 그제야 날아와 쓰러진 용마 앞에 꽂혔다. 이에 견훤은 가슴을 치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임실에 치마대가 있다. 강진면에 섬진중학교의 안산인 다래끼봉이 있는데 치마대(馳馬臺)라고도 부른다. 후백제를 창업한 견훤이 이곳에서 말을 달리며 군사 훈련을 했다는 전설이 이 지역에 옛이야기처럼 아스라이 전해온다. 그런데 운수지(1675)에 견훤대(甄萱臺)라고 지명이 명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견훤 전설의 신뢰성을 확인해 주는 의미가 크다.

진전방(眞田坊)은 장수 팔공산 기슭에 있다. 서쪽으로 뻗어 대(臺)를 이루고 있다. 이름하여 약산(躍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세상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장군 최형(崔瀅)이 나성부원군(羅城府院君) 오자치(吳自治)의 사위가 되어 평상시 이곳에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혔다. 그는 매번 한 개의 화살을 쏘아 놓고 말(馬)에게 화살을 좇차 뛰어가게 하였는데 화살과 말이 같이 도착했다고 한다. 하루는 말보다 화살이 먼저 이르렀다. 장군은 그 말이 화살에 미치지 못했다고 하여 말의 목을 베었다. 그런데 이미 말의 목을 베어버렸는데 그 때야 화살이 이르렀던 것이다. 최형은 후회(後悔)하고 그 말을 이 대 아래에 묻어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말 무덤이 있다.

최형장군이 일찌기 치마대 위에서 활로 화살을 쏘았다. 그 화살이 떨어지는 곳을 잃어버렸는데 농부(農夫)가 화살을 주워 가지고 왔다. 화살이 떨어진 곳은 쏘는 곳으로 부터 10리 거리에 있었다. 뒷 사람들이 이에 그 밭의 이름을 시락(矢落)이라 하였던 것이다.(남원 용성지)

이성계가 무예를 닦을 당시 어느 연못에서 튀어나온 한 마리 용마가 있었는데 무척 사나워서 아무도 길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이성계가 마침내 그 말을 길들이는데 성공해 자신의 애마로 삼았다. 이후 무예를 연마하던 그는 자신의 애마가 얼마나 뛰어난지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하여 멀리 과녁을 두고 화살을 쏜 후 쏜살같이 말을 달렸다. 그러나 과녁에 도착해서 보니 과녁에는 이미 화살이 하나 박혀 있었다. 화살보다 느린 말에 화가 난 이성계는 칼을 뽑아 말의 목을 쳤다. 그 순간 화살 하나가 날아와 과녁에 박혔다. 이미 박혀 있던 화살은 누군가 전에 쏜 것이었다.

완주군 비봉면 백도리 성산에 전하는 전설도 유사하다. 말을 길들이던 주인이 활을 쏜 뒤 성산으로 달려갔다가 화살보다 느린 말을 죽인다. 그러나 잠시 후 아까 쏜 화살이 날아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말을 죽인 것을 후회했다. 이렇듯 경솔하게 애마를 죽인 것을 후회한 장수가 애마를 위해 만들어 준 말무덤이 전국에 100곳이 넘는다는 조사도 있다. 한편 전설 증거물로서 이러한 말무덤은 일부 의마총(義馬塚)으로 불리는 변이형도 있다.



△ 지리산엔 천왕모 전설 전해

지리산 천왕봉에는 고려시대부터 지리산천왕모의 신상이 모셔져 있었다. 조선 조에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 수많은 유학자며 시인묵객들 그리고 스님들이 지리산을 둘러보고 답산기를 남겼는데, 이들이 말에서 내리지 않고 말을 타고 지리산천왕모의 앞을 지나다가 모두 말의 다리가 부러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말은 군용으로도 사용되지만 신분이 높은 유학자나 권세가들이 타는 것이기도 하다. 지리산천왕모는 팔도 무당의 무조(巫祖)로도 알려져 있는데, 민간에 전해지는 이러한 전설은 유학이나 불교에 반하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외래 종교사상에 대한 토속종교의 우위를 설정해 놓은 민간 사고의 투사로 볼 수도 있다. 유사한 관념의 투사로서 특히 위에서 보듯이 선비나 주지 스님을 속이는 민담은 상하의 사회적 대립각을 말을 통해 서사화하면서도 상층 패배, 하층 승리의 구도를 설정하고 있다.



△전라도와 목장지도(牧場地圖)

‘목장지도(牧場地圖)’는 1678년(숙종 4)에 완성한 전국의 목장 정보를 알려주는 지도다.당시 전국 목자 수는 경기도 874인, 충청도 705인, 경상도 166인, 전라도 1,006인, 황해도 421인, 평안도 176인, 함경도 444인, 제주목 754인, 정의현 365인, 대정현 126인, 기타 141인으로 5,178인이었다. 전라도엔 12읍 49목장 중 16개 목장이 운영됐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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