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수필] 아름다운 동행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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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벤치에 앉아 홀짝홀짝 캔 커피를 마신다. 참 처량하다. 혼자 산책을 나선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거늘, 오늘따라 왜 느낌이 이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이와 싸웠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의 마음속에 스며 있어 언제 어디서나 하나로 지낸다. 둘이 사이가 좋을 때는 홀로 다녀도 서로 늘 마음속을 차지하기 때문에 어디에 있든 절대로 처량한 법이 없었다. 그러나 싸우고 나면 마음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밀쳐 내버린다. 그래서 화해할 때까지 나 혼자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홀로 산책을 해도, 차를 마셔도 늘 처량한 느낌이 등 뒤를 졸졸 따라붙는다.

우리 부부는 사랑을 주춧돌 삼아 무텅이 땅을 일구듯 열심히 살았다. 잘 알수록 상대방의 다른 점을 인정하고 보듬으며 살아야 하는데, 내 기준으로 상대를 재단하여 서로 다 안다고 우기며 다툰다. 그래서 가끔 살아온 세월의 진폭으로 사랑을 보장받으려고 한다. 별것도 아닌 일에 날을 세우고 서로 뜨개질하며 으르렁거리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참 많이 다퉜던 것 같다.

세월은 부부들에게 함께 해 온 둘의 사이에서 날 선 각을 무디게 하는 풍화작용을 한다는데, 우리 부부는 아직도 날을 세운 채 머리를 꼿꼿하게 버티고 있는 돌멩이 같다. 함께 한세월을 본다면 둘은 분명히 깎이고 닳아 강의 중류 어디쯤에서 둥글둥글한 돌멩이 같아야 하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그 기대만큼은 아직 버릴 수 없다. 이웃에 사는 호호백발 부부의 산책을 날마다 지켜보며 세월의 풍화작용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보기에는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부부다. 허리 굽고 키 작은할머니와 연세에 비교하면 허리도 꼿꼿하고 아주 훤칠하게 잘생긴 할아버지다. 하지만, 우리 아파트단지 내에서는 잉꼬부부로 소문이 자자하다. 두 분은 늘 두 손을 꼭 잡고 산책한다. 그렇다고 매일 다정한 모습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걷기도 하지만, 어느 날은 옥신각신 다투기도 한다. 참 신기한 것은 입으로는 쉼 없이 다투지만, 언제나 두 손은 꼭 잡고 걷는다.

할아버지는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오토바이를 젊은이 못지않게 잘 타신다. 할머니더러 “야! 타!”하면, 할머니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오케이! 야타족도 안부럽당게” 하신다. 60년 세월을 함께 살면서 어떻게 순탄한 평지만 걸을 수 있었을까? 숨 가쁘게 언덕길을 오르기도 하고 사나운 폭풍우도 만났으리라. 그러나 그럴 때마다 주인이야 싸우든지 말든지 꼭 잡은 두 손은 열심히 진실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중재했던 모양이다.

긴 세월 고단한 인생길에서 동반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행은 함께 늙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동행이란 부귀영화를 보고 정신없이 쫓아가는 덧없는 길이 아니라 함께 세상을 느끼며 묵묵히 행복을 찾아가는 길이라는 걸 몸소 실천하고 계시는 어르신의 발자국이 깊다. 그 위로 붉은 노을이 조용히 내려앉는다. 나도 마지막 커피 한 방울까지 탁탁 털어 마시고 그 길을 따라 집으로 향했다.



김영숙 수필가는



2006년 '月刊 시사문단' 등단

수필집: '사소한 아줌마의 소소한 행복', '섬진강 들꽃처럼', 시집 '꽃에 안부를 묻다'

제22회(2018년) 임실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전북문인협회 회원, 전북시인협회 회원 현 임실문협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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