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소란(지은이 구연배, 펴낸 곳 신아출판사)’은 지은이의 열 번째 시집으로 인공지능의 물질문명시대와 ‘번뇌즉보리’의 대승사상을 잘 보여준다.
연꽃은 맑은 고원의 물에서보다는 오히려 진흙밭에서 꽃을피운다. 번뇌의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지혜의 보물을 얻을수 없다. 불도는 굳이 깊은 산골에 들어가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전개하면서 불법을 버리지 않는 곳에 있다. ‘유마경’에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라 했나, '번뇌가 일어난 그 자리가 깨달음의 자리이며 생사가 일어난 그 자리가 열반의 자리'라는 뜻이다.
이 시집은 결국 기억과 망각, 부재와 현존, 떠남과 머묾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조건을 탐구하는 여정이며, 그 여정은 상동이라는 헤테로토피아적 공간을 통해 구체화된다. 가장 멀리 간 것들이 가장 가까이 있다는 이 역설 속에서, 우리는 존재의 본질과 마주하게 된다.

시인의 의식은 누구나 그렇듯 시간의 연속성 위에 놓인다. 하지만 시인의 시간은 흐름이 아니다. 찰나적인 충돌과 함께 번득이는 깨달음이란 삶의 비의일 수밖에 없어서 시인의 시적 의식은 화석처럼 언어의 질감으로 빛을 얻는 순간이 된다.
시인의 시의 위치가 외따롭고 번잡을 견디는 인고(忍苦)의 시간에 놓이는 것은 그의 시적 관심이 지극히 사소하면서도 내면의 응시를 놓치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시인의 운명과 다름 아닐 것이다. 시인이 시를 쓰는 근원과 그토록 오랜 천착에 대한 물음과 대답의 메아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무구한 생명력으로 작용한다.
시는 울음을 삼키듯 묵음으로 서 있고, 침묵 속에서도 끝내 멈추지 않는다. 일상의 사소한 풍경 속에서도 시인은 끊임없이 ‘시인이 해야 할 일’을 되묻고, 사라져가는 것들을 끝까지 바라본다. 떠나간 자들은 조용히 서로를 위로하지만, 남겨진 자의 슬픔은 오롯이 살아 있는 시인의 몫으로 남는다.
잊히고 사라져가는 사람과 사물을 따뜻한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서정성 깊은 시로 구성됐다. 삶의 고달픔을 얼룩에 비유하며 그것이 죄의 낙인이 아닌 극복해 살아온 상흔이라는 새로운 인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역시 시인의 연륜을 속일 수는 없는 듯하다. 한숨의 줄기가 푸른 물결처럼 솟아나는 날의 낟알을 빻고 씻고 찌고 만나는 시집이다.
‘바다가 한결같이 푸르고 / 영원한 이유는 // 제 몸을 치며 / 사력을 다해 부서지는 파도의 / 통증 때문 아닐까 // 하루에도 수십 번 넘어지고 깨져 / 시퍼렇게 멍드는 청춘처럼 / 바다는 젊고 싱싱한 모습으로 / 부활하는 것인데 / (중략) / 흐르는 바다 / 떠 있는 섬 / 영원과 순간이 구별되지 않는다. ‘흐르는 바다’ 일부)’
‘물결은 마음을 흔들고 / 수심 밖으로 밀어내는데 //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 안간힘의 기울기가 / 저 바다로 나를 싣고 가는 / 그리움의 푯대다 // 당신을 흘러가는 나는 / 마음도 무게도 가질 수 없는 / 하얀 종이배.(’종이배’ 일부)‘
구연배 시인의 시에는 바다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은 편인데 이번 시집도 예외가 아니다. 그의 시에서 바다는 치열한 삶의 현장을 의미한다. 두 편의 시 ’흐르는 바다‘와 ’종이배‘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조약돌’의 주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흐르는 바다’에서 화자는 바다가 영원히 푸른 이유를 사력을 다해 부서지는 파도의 통증이 있어서라고 말하고 있다. 깨어지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바다의 젊음이 바다가 매일 부활하는 비결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건 따로 제시되어 있다. “흐르는 바다 / 떠 있는 섬 / 영원과 순간이 구별되지 않는다.”
김광원 문학평론가(시인)는 “시인은 영원과 순간을 하나의 덩어리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의 앞부분에서 바다가 영원히 푸른 이유를 순간적으로 부서지는 파도의 움직임에서 찾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와 같이 불변과 변화, 영원과 순간을 하나로 보는 것에서 시인의 대승적 관점이 읽혀진다”고 했다.
시인은 온갖 사물에 자아를 투영하여 인간의 존재론적 위상을 선명하게 드러내면서, 동원되는 모든 사물의 섭리와 자신의 서정성을 합일시킨 그 이미지들을 형상화하는 작업으로 일관되게 시를 써 왔다.
그의 시는 의인과 의물을 유연하게 넘나들면서도 관조적 감정의 중심을 놓치지 않고 경계를 허무는 힘 즉, 현실과 상상, 자아와 타자, 이성과 감정 사이를 매끄럽게 넘나들며 독자를 시 속의 세계로 은근히 끌어당긴다. 나이가 듦에 따른 의식이 뚜렷하게 보이면서도 공포라든가 허무주의로 빠지지 않고 차분한 삶의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문헌정보학박사로 1995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 '아름다운 소란' 외 9권을 펴냈다. 현재 진안문인협회 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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