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수 이성렬 영세불망비
순창군수 이성렬(李聖烈·1865∼1906?)이 동학농민혁명이라는 국가적 격변 속에서 보여준 행정개혁과 향약 운영, 그리고 지역사회 통합 전략이 단순한 '우연한 안정'이 아니라 의식적이고 체계적이며 유교적 통치 철학에 근거한 결과였음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박대길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 한국유교문화진흥원 발간 ‘한국유교문화’ 5집에 '순창군수 이성렬의 개혁정책과 유교적 지방행정-동학농민혁명 질서유지의 의미‘를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1890년대 전라도가 광범위하게 동학농민군의 점령과 충돌을 겪는 가운데, 순창이 예외적으로 큰 혼란을 겪지 않으며 지역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개혁적 지방관의 선제적 대응, 그리고 지역민의 자치 역량과 신뢰의 결집이 있었다.
향약 재편, 결역 이정, 인보조직 강화는 단순한 행정 명령이 아닌 지역사회의 자율적 통제력을 복원시키는 제도적 기반으로 기능하였다. 이는 동학농민군의 강압적 개입이나 민보군·수성군과의 폭력적 충돌로 치달았던 다른 지역과 뚜렷한 대비를 이루는 지점이다.
이성렬은 만 28세였던 1892년 11월 순창군수로 부임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순창군 현실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는 같은 시대 부패한 많은 수령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근본적인 방법을 강구했는데, 이러한 시도들은 1893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박대길
그의 대응은 동학농민군을 일방적 '적'으로 규정하거나 무력 진압일변도로 나아간 기존 관료들과도 달랐다. 그는 탐학한 수령에 대한 징계와 세제개혁을 통한 민심 회복, 회유와 안무(安撫), 최종적 무력 진압이라는 단계적 접근을 제시함으로써, 당시로서는 드물게 정세 인식과 실사구시적 문제 해결을 결합한 지방관상(像)을 보여주었다.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그의 토벌 제안에 강한 반발을 보이면서도 결국 그의 가족을 보호한 사례는, 적대와 존중이 교차한 독특한 관계였음을 증명한다.
더 나아가 순창의 아전과 백성이 '동학에 의탁하여 집강소를 설치한 특수한 사례는 집강소 설치가 단순히 동학농민군에 의한 강압적 장악이 아니라 지역 내부의 주체적 선택과 자치적 운영이 가능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이는 동학농민혁명 연구에서 지역별 대응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성렬의 개혁정책과 행정 운영은 동학농민혁명기의 혼란 속에서도 지방관 한 사람의 행정 철학과 실천이 지역사회의 질서와 안정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례이다. 동시에 이는 조선 후기 유교적 목민관상이 단순한 환념이 아니라, 실질적인 행정 능력과 제도 운영, 백성과의 신뢰 속에서 구현될 수 있었음을 확인시켜준다.
결국, 순창의 경험은 동학농민혁명기를 바라보는 시각을 '봉기와 진압'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지역의 사회구조·행정체계·지방관의 성향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복합적 역사 경험으로 재조명하게 한다.
박소장은 “이 연구가 이러한 관점 전환에 이바지함으로써, 향후 동학농민혁명기 지방사 연구는 물론 조선 말기 지방행정사와 목민관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하나의 토대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한편 &;군수 이성렬 영세불망비(郡守李聖烈永世不忘碑)는 순창 복흥면 석보리 마을회관 앞에 군수 신대균 공적비와 함께 나란히 서 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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