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정치적 적대는 사회를 둘로 가르고 있다. 경제적 기회는 소수에게 집중되며, 타인에 대한 존중감을 잊어가는 현상은 이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우리가 직면한 이러한 위기는 단순한 제도개편이나 정책 보완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으며, 인간의 내면을 다시 일깨우는 근본적 혁신이 요구된다. 격동의 시기인 19세기 후반, 조선의 고질적인 사회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던 오래된 가르침을 통해 오늘을 성찰해 보자.
사회적 혼란과 구조적 불평등이 극심하던 1860년대, 수운 최제우(1824∼1864)가 내놓은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인간 안에 깃든 ‘하늘’을 발견하는 영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는 “사람을 하늘처럼 대하라(事人如天)”는 실천적 가르침을 통해 개개인의 평등한 존엄성을 중시하였다. 이는 신분과 계급의 차별이 극심했던 봉건 질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혁명적 사유였다. 그러나, 당시 무지한 조선왕조는 ‘혹세무민’이라는 죄목으로 수운을 처형하였다.
수운의 가르침은 해월 최시형과 전봉준에 의해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졌고, 의암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3·1독립운동을 이끄는 사상적·정신적 토대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또한, 방정환이 1923년 발표한 ‘어린이 선언’은 제네바 아동권리선언보다 1년 앞선 세계 최초의 아동 인권 선언으로 평가된다. 이는 동학·천도교가 추구한 인권평등의 철학이 얼마나 급진적이면서도 시대를 앞서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수운의 시천주 사상은 곧 ‘모심(侍)’의 실천철학이다. 내 안에 하늘을 모신다는 뜻은 자기 존재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며, 불평등과 차별이 만연한 사회적 병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의술과 같다. 더 나아가 타인을 하늘처럼 대하는 것은 경쟁과 서열화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잃어버린 공경과 배려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이 된다.
수운의 ‘모심’ 철학은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재정립하려 했던 근대적 인권 사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사람을 하늘같이 존중하는 태도는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혐오와 차별, 폭력을 넘어서 사회 전체의 관계 회복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 존엄·평등·자주라는 보편적 가치로 승화되며 한국 근대사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은 정신적 유산이 되었다. ‘모심’의 철학은 특정 종교의 교리를 넘어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치적·윤리적 단절을 잇는 실천적 가치이다.
수운은 또한 ‘다시 개벽(開闢)’을 강조했다. 이는 막연한 종말론적 예언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존속하고 있는 부정과 차별을 걷어내고 새로운 질서를 스스로 열어가려는 적극적 실천이었다. 동학농민군이 제시한 당시 폐정개혁안은 신분제 폐지, 탐관오리 징벌, 과부 재가 허용, 노비문서 소각, 토지의 균등 분배 등의 내용은 당시 사회 구조의 뿌리에 자리한 불평등을 정면으로 뒤흔든 혁신적 개혁이었다. 우리 근대 역사에 있어서 동학혁명은 인간 존엄을 회복하려는 ‘개벽’의 사회적 실천이었음이 분명하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의 뿌리를 더듬어 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드러난다. 바로 자신과 타인에 대한 존중 인식의 붕괴다. 과도한 경쟁은 타인을 적으로 만들고, 정치적 분열은 공동체를 해체하며, 물질 중심의 가치관은 인간을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다. 청년층의 고립감, 중장년층의 삶의 피로 누적과 소진 현상, 노년층의 외로움은 모두 이러한 존중의 기반이 무너진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징후다. 자기 자신과 타인을 존귀한 존재로 바라보는 내적 실천, 즉 ‘모심’이 회복될 때 비로소 평화로운 공동체의 기반이 마련된다.
우리는 기술문명의 눈부신 발전 속에서 오히려 인간다움을 잃어가고 있다. 인공지능은 효율과 편의를 높일 수는 있지만, 인간의 존엄을 대신할 수 없다. “하늘은 내 안에 있다”는 단순하고도 깊은 자각은 한국 사회가 다시 성숙한 공동체로 나아가는 길을 밝히고 있다. 존엄성의 회복, 상호 신뢰의 회복, 생명의 회복은 바로 오늘 우리가 실천해야 할 ‘새로운 개벽’이다. 우리 각자가 나와 타인을 하늘처럼 모시는 오래된 가르침을 다시 실천할 때, 비로소 온전한 문명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박광수(원광대학교 명예교수, K-전통문화학술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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