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동학 15]“조직 없이는 혁명도 없다"

동학혁명의 기반이었던 동학의 접포(接包)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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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운동은 서기 1860년 수운 최제우 선생의 생명의 실상에 대한 큰 깨달음과 민중 생명의 자기복귀를 위한 민중 자신의 자각적이고 인위적인 조직 실천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고(故) 김지하(1941-2022) 시인이「인간의 사회적 성화 &;수운 사상 묵상」(『남녘땅 뱃노래』, 1985, 아래 사진)에서 강조한 말이다. 여기서 ‘자각적이고 인위적인 조직 실천’이란 말은 동학농민혁명이 동학의 접과 포를 기반으로 처음에는 영성(靈性)공동체로 출발하여 생활(生活)공동체로 발전하고, 마침내 소외와 억압과 약탈, 분단과 파괴라는 죽임의 세력에 저항하는 혁명(革命)공동체 운동으로 발전해 갔음을 강조한 말이다.



김 시인이 설파한 것처럼, 동학농민혁명의 조직 기반은 동학의 접과 포에 있었다. 그러나 접과 포가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접과 포 조직의 역할과 특징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간 알려진 바가 없었다.

주지하듯이, 수운 최제우는 1860년 4월 5일(음력)에 동학을 창도하고 그로부터 1년에 걸친 수련을 거쳐 1861년 6월부터 동학의 가르침을 펴는 포덕(布德) 활동을 시작하였다. 포덕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일반 민중들은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며 경주 용담으로 몰려왔다. 그 광경은 김기전,「대신사 수양녀인 팔십 노인과의 문답」,『신인간』16, 1927년 9월호 및「정운구 서계」,『비변사등록』, 1863년 12월 20일 조에 잘 드러나 있다.

‘용담에 신인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오는 사람들 속에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대외적 위기 속에서, 삼정문란(三政紊亂)이라는 지배체제 위기 속에서, 또는 자연재해 빈발 및 전염병 유행 속에서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던 일반 민중들은 물론이려니와 대내외적 위기에 대해 무력하기만 한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실망한 지식인들도 있었다. 일반 민중은 물론 지식인들마저 다투어 동학에 뛰어들게 되자 수운은 자신의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전할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찾아오는 이들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또 한편으로는 동학의 주문 수행을 자의적으로 행함으로써 관변 측이나 보수 유생들로부터 불필요한 오해와 탄압을 초래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수운은 1862년 12월 말 경상도 흥해 매곡(아래 사진)에서 15개 지역에 16명의 접주(接主)를 두는 접제(接制)를 실시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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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주 제도를 선포한 경북 포항시 흥해읍 매산리 매곡동 전경

(출처: 수암 염상철,『동학만리』, 모시는사람들, 2025)



그러면, 동학의 접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동학의 접 이전에도 접이란 말은 있었다. 아래와 같이 통일신라의 사상가 최치원(崔致遠)의「풍류도(風流徒)」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최치원의 난랑비서에 이르기를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그것을 일러 풍류 도라 말한다. 그 가르침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하게 갖추어져 있으니 이 것은 실로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며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와 접화(接化) 한다.”(崔致遠 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 敎 接化群生) (『삼국사기』 진흥왕 37년 조)



동학의 접은 풍류도에서 유래한다. 즉, 동학의 접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와 접(接)하여 그들을 감화(感化)시킨다”는 뜻을 지닌 풍류도의 접화군생에서 유래한 것이다. 물론, 동학의 접 이전에 조선 시대의 서당(書堂) 훈장을 일러 접장(接長)이라 부르고, 서당에서 이루어지는 학문 활동을 거접(居接)이라 불렀다든지, 보부상(褓負商)의 우두머리를 접장(接長)이라 불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동학의 접이 서당이나 보부상의 접으로부터 일정하게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동학 창도의 역사적 배경으로 보나 동학의 핵심사상인 시천주 사상에서 유추해 볼 때, 동학의 접이 서당이나 보부상으로부터 유래했다기보다는 “모든 생명체와 접하여 그들을 감화시킨다”는 풍류도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음은 동학의 포 조직의 유래와 그 성립과정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동학의 포라는 말 역시 앞에서 설명한 최치원의 풍류도에 나오는 포함삼교(包含三敎)에서 유래한다. 동학의 포 제도는 접 제도보다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시행되게 된다. 즉, 1862년 12월 말에 처음 시행된 동학의 접 제도는 관변 측과 유생 측의 탄압과 감시 속에서 때로는 위축되기도 하고 때로는 일부 접이 해체되는 위기에 직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비밀 유지에 매우 적합한 연원제(淵源制) 즉 인맥(人脈) 중심의 점조직 형태를 띠고 있던 덕분에 접 조직은 탄압 속에서도 급속히 퍼져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80년대 후반에 이르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삼남 지방의 각 군현 가운데 동학의 접 조직이 없는 고을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그 수가 늘어났다. 접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남에 따라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연원을 달리하는 접끼리 경쟁하거나 대립하는 현상도 발생하고, 교세가 약한 접을 교세가 강한 접이 핍박하거나 흡수하는 현상도 발생했다. 또한, 어떤 한 지역에서는 연원을 달리하는 복수(複數)의 접이 난립하여 관의 탄압을 자초하는 현상마저 발생했다. 거기에 더하여 스승 수운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동학의 가르침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움직임마저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포제(包制)를 도입하게 된다.

포 제도는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892-3년경에 도입되었다. (표영삼,「접포 조직과 남북접의 실상」, 한국학논집 25, 1994, 153-154쪽) 그리하여, 1893년 3월의 충청도 보은집회에는 충의포(忠義包), 선의포(善義包), 상공포(尙功包)를 비롯하여 청의, 수의, 광의(廣義), 홍경, 청의, 광의(光義), 경의, 함의, 죽경, 진의, 옥의, 무경, 용의, 양의, 황풍, 금의, 충암, 강경포 등 포 단위로 결집한 동학교도들이 참가하였는데(「취어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1, 2007, 22쪽) 그 수는 무려 2만 3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면 동일 권역 안에 있는 접들을 포괄하는 포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접과 마찬가지로 포의 규모를 알려주는 기록이 없어 단정할 수는 없으나 동학농민혁명 당시 유생들에 의해 기록된 자료를 보면, 규모가 작은 포의 경우 수백 명, 규모가 큰 경우에는 수천 명에 이른다. (황현,『오하기문』) 이 같은 포 조직은 일반적으로 2개 이상의 군현을 포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포가 인맥 중심으로 형성된 복수의 접 조직을 동일 권역을 중심으로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를 총괄 지도하는 지도자를 일러 대접주(大接主)라 불렀으며, 대접주 밑에는 그를 보좌하는 여섯 개의 직책이 있었다. 이들 직책 이름은 교장(敎長), 교수(敎授), 도집(都執), 집강(執綱), 대정(大正), 중정(中正)으로서 이를 일러 육임(六任)이라 했다.(「본교역사」,『천도교회월보』 21, 1912년 4월호, 16쪽) 육임은 대접주의 지시를 받아 포의 제반 업무를 관장하였으며, 이들이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의 본부를 일러 육임소(六任所)라 부르기도 하였다.

포 조직의 제반 업무를 효율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도입된 제도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육임제(六任制)이다. 동학 사료에 따르면, 육임제는 1884년경에 처음으로 구상되고, 1887년경에는 해월 최시형이 주재하는 곳에 처음 도입되며(「해월선생문집」1887년조), 1890년대 초에는 각 지역의 포에도 도입되어 널리 시행되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중에 농민군 자치가 이루어지는 1894년 5월 이후의 집강소 조직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육임제를 근간으로 한 동학의 포 조직은 교조신원운동기 및 동학농민혁명기에 동학 교도와 일반 민중을 조직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그래서, 기포(起包)라는 말은 동학의 포 조직을 기반으로 농민군이 봉기한 데서 유래한다. 요컨대, 동학농민군은 동학이 오랜 기간 준비한 접포 조직을 기반으로 19세기 말 세계사에서 최고&;최대 규모의 ‘아래부터의 혁명’을 도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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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임 임명장과 육임제를 처음 구상한 공주 가섭사 전경

(출처: 동학혁명기념관,『동학혁명 자료&;사진전』, 1996)에서

/박맹수(원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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