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선 외식업체 대표이자 '명품 쉐프' 박창준(36)은 나이에 비해파란만장한 인생을 경험했다.
그의 이력서에는 특급호텔 요리사, 남극 세종기지 파견 쉐프, 피자 외식업체 대표등 나이테가 선명하다.
“저는 7살 때부터 부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의 첫마디는 단순한 욕심이 아니라, 절박한 현실에서 비롯된 꿈의 선언이었다.
어릴 적 부모님의 다툼은 늘 돈 때문이었고, 어린 그는 그때부터 ‘돈이 있으면 가족이 행복해질 것’이라는 믿음을 품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혼자서 신문사에 찾아가 배달일을 구하려다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하지만 부모는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돈은 나중에 벌어도 된다. 지금은 공부를 열심히 해라.”
하지만 그는 공부보다 ‘사람’을 좋아했다.
친구를 사귀고, 이야기를 나누며, 세상과 부딪히는 게 더 즐거웠다.
그때 이미 그의 인생의 방향이 정해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요리라는 길, 그리고 끝없는 좌절
중학교 2학년, 그는 우연히 “요리사는 돈을 많이 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순간 그의 인생은 요리로 향했다.
요리학원에 등록하고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지만, 결과는 낙방의 연속이었다.
필기시험만 세 번, 실기는 수십 번 떨어졌다.
주변에서는 ‘안 된다’며 비웃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들 자격증을 1년에 네 개씩 딸 때, 저는 5년 동안 세 개밖에 따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 5년 동안 칼질 하나만큼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게 되었죠.”
그는 결국 칼질 하나로 호텔 주방에서 인정받는 요리사가 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노력만으로 부자가 되는 건 아니었다.

남극으로 향한 요리사의 모험
24살, 그는 세계적인 셰프를 꿈꾸며 미국행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남극 요리사 채용공고’를 보았다.
당시 월급은 400만 원.
그의 눈에는 미국으로 가기 위한 발판처럼 보였다.
하지만 경쟁률은 상상 이상이었다.
수천 명이 몰려 서버가 마비될 정도였고, 지원서를 제출하지도 못한 채 채용이 끝났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력서를 직접 들고 서울 서초동의 회사 앞에서 8시간을 기다려 담당자를 만났고, 결국 남극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극지의 혹한 속에서 5개월간 요리사로 근무하며 “인생에서 불가능은 없다”는 확신을 얻었다.
하지만 귀국 후 3일째 되던 날, 운명처럼 옛 동료였던 지금의 아내를 다시 만났고, 미국행 대신 결혼과 정착을 택했다.
형제의 꿈, 그리고 폐업의 눈물
그는 형과 함께 천안에 뉴욕식 조각피자집을 열었다.
퇴직금과 대출금을 모두 쏟아부은 첫 창업이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10개월 만에 폐업. 빚만 남았다.
형은 직장으로 돌아갔고, 그는 홀로 남았다.
“딸은 돌도 안 됐는데, 고기 100g을 살 돈이 없었어요.”
그는 다음날부터 공사장으로 나갔다.
하루 20시간씩 반찬가게, 고깃집, 중국집, 정육점을 전전했다.
걸어서 5km를 출퇴근하며, 유튜브로 모든 순간을 기록했다.
“언젠가 성공했을 때 이 기록이 나에게 증거가 될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몸은 버티지 못했다. 과로와 영양실조로 쓰러졌고, 수족구로 손톱과 발톱이 다 빠졌다. 의사는 “미네랄이 다 고갈됐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전주로의 이주, 또 한 번의 모험
그때 그의 유튜브를 본 전주의 ‘오원집’ 대표가 연락을 해왔다.
“당신의 열정이 필요합니다.”
주변은 모두 반대했다. 만삭의 아내, 안정된 생활, 그리고 전주라는 낯선 도시.
“부모님, 친구, 아내 모두 말렸어요. 하지만 저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결국 가족을 설득해 전주로 내려갔다.
본점에서 10개월간 교육을 받고, 대표와 함께 ‘오원집 삼천직영점’을 오픈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그는 그 자금을 바탕으로 자신의 첫 독립 매장 ‘오원집 여의점’을 열었다.
실패의 자리에서 피어난 아이디어
여의점의 첫 1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매출은 떨어지고, 손님은 줄었다.
“아무리 친절해도, 아무리 맛있어도 안 됐어요. 남들도 다 하는 노력만으로는 경쟁력이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는 장사가 끝나면 스터디카페로 향했다.
시장조사, 데이터 분석, 마케팅 공부를 했다.
그리고 행동했다.
자신의 차에 매장 홍보 스티커를 붙이고, 전북현대 축구경기장 앞에 주차해 홍보를 시작했다.
‘움직이는 현수막’이었다.
그날 이후 경기 날마다 가게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또 고객의 고민을 관찰해 ‘세트메뉴’를 도입했다.
대표 메뉴를 묶은 ‘오징어삼합 세트’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때 매출이 한 달 만에 20% 이상 올랐습니다. 진심은 반드시 통한다는 걸 깨달았죠.”
“행동하는 자만이 변화를 만든다”
그는 장사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한다.
“똑똑한 사람은 많지만, 행동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기본조차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사장이든 알바든, 프로의식이 없다면 성공은 없습니다.”
그는 지금도 새벽부터 밤까지 현장에 선다.
그리고 말한다.
“알바라도 사장처럼 일해야, 사장이 됐을 때 진짜 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그의 목표는 단순한 돈이 아니다.
그는 언젠가 자신만의 외식 브랜드를 만들어, 세계 5대 프랜차이즈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꿈꾼다.
“우리나라에서도 맥도날드나 졸리비처럼 세계로 나아가는 브랜드를 만들 겁니다.”
그리고 그 꿈의 끝에는 또 다른 목표가 있다.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돕는 어린이재단을 설립하고 싶어요. 그 아이들이 꿈을 꿀 수 있게 돕는 게 제 지상목표입니다.”
“인생은 불충분한 전제에서 충분한 결론을 끌어내는 기술”
그는 자신을 “공사장 잡부 출신 외식 CEO”라 부른다.
6년 전까지만 해도 일용직으로 일하며 하루하루 버텼던 청년이, 지금은 전주에서 가장 주목받는 외식인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기회는 찾아오는 게 아니라, 내가 찾아가는 겁니다.
꾸준히 진심으로 노력하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당신을 도울 겁니다.
가시밭길을 만나더라도 꿈만 버리지 마세요.
그렇다면 시련은 있더라도 실패는 없습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7살 소년처럼 반짝였다.
돈 때문에 울던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이제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괜찮아. 넌 결국 해낼 거야.”
글·사진 | 정종인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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