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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동학14] ‘혁명은 보듬어 안는 것’ -동학군의 도덕성은 어디에서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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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7월에 도쿄(東京)에 있는 일본 외무성 산하 외교사료관(外交史料館)을 찾았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자료 조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래, 2002년까지 6년 동안 여러 차례 동 사료관을 찾아 자료 조사를 하여 그 결과를「일본지역 근현대사 자료 소장 현황에 대하여-동경 지역을 중심으로」(『한국독립운동사연구』19집, 2002년 12월)라는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런데, 1997년 7월의 첫 조사에서『조선국 동학당 동정에 관한 제국공사관 보고 일건』(朝鮮国東学党動静ニ関シ帝国公使館報告一件)이라는 문서를 발견했다. (위 사진 참조) 한국인 연구자로서는 처음으로 접하는 희귀 자료였다. 그 문서 안에는 놀랍게도 동학농민군의 높은 도덕성을 보여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동학당에 관한 속보」(주한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 발, 제63호) 속의 ‘경포도청기교정탐기(京捕盜廳機校偵探記)’에 포함된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었다.



동학농민군 대장이 각 부대장에게 명령을 내려 약속하기를, 우리 동학농민군은 매번 적을 상대하여 싸울 때에는 칼에 피를 묻히지 아니하고 이기는 것을 으뜸의 공으로 삼 는다. 어쩔 수 없이 싸우더라도 상대의 목숨만은 해치지 아니하는 것을 귀하게 여 긴다. 매양 행진하며 나아갈 때에는 절대로 민가에 피해를 끼치지 아니한다. 효자와 충 신과 우애와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 사는 동네로부터 십 리 안에는 절대로 주둔하지 않 는다.

12개조 기율

항복하는 자는 사랑으로 대한다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탐관(貪官)은 쫓아낸다 따르는 자는 경복(敬服)시킨다

굶주린 자는 먹인다 간활(姦猾)한 자는 그치게 한다

도망가는 자는 쫓지 아니한다 가난한 자는 진휼(賑恤)한다

충성스럽지 못한 자는 제거한다 거스르는 자는 잘 타이른다

병든 자에게는 약을 준다. 불효한 자는 벌을 준다



이 내용은『주한일본공사관기록』1 (국사편찬위원회, 한글본) 19-20쪽,「동비토록(東匪討錄)」(『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6, 1996) 175-176쪽,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면양행견일기(沔陽行遣日記)」(『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4, 1996) 320쪽 등에도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어 자료의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위 내용을 살펴보면, 사람의 목숨 곧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동학농민군의 높은 도덕성 즉 철저한 규율이 그 누구라도 감탄할 정도로 잘 드러나고 있다. 동학농민군의 철저한 규율과 높은 도덕성에 대해서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던 매천 황현(1855-1910)마저도 다음과 같이 높게 평가하였다.



관군은 행군을 할 때는 연도에서 노략질을 하는가 하면 점포를 부수고 상인들을 약탈했 다. 또 떼를 지어 마을로 몰려가 닭이나 개조차 남겨 놓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은 하나 같이 치를 떨었지만 겁이 나서 일단 피하고 보았다. 장교라는 사람도 기율이 없기는 마 찬가지였다. (중략) 반면 도적(동학농민군-주)은 감영과 고을의 관청에 이미 쌓이고 쌓인 원한이 있는 데다, 또 관군의 횡포에 대한 증오까지 겹쳐 관군이 하는 짓과는 반 대로 하는 데 주력했다. 주변의 주민에게 폐를 끼치는 행위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려 조 금도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심지어 행군하다가 주변에 쓰러진 보리를 보면 일으켜 세 워 놓고 갔다. (김종익 옮김,『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梧下記聞)』, 역사비 평사, 2016, 138-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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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 아니다. 제1차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동향을 정탐했던 일본인 경찰마저도 “이곳 태인(泰仁)은 일단 동도(東徒; 동학농민군)가 점령했던 곳이 되어 그 피해가 상당하리라 생각했는데, 민가 및 관청 등이 하나도 파손된 곳이 없으며, 또한 동학도가 통과할 때를 당해 그들은 하등의 폭행을 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손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위의「內亂 鎭定 後의 全羅道」,『都新聞』1894년 8월 2일, 1면)” 라고 하여 농민군의 규율이 엄정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 기사는 서울의 일본 경성영사관(京城領事館) 경찰 오기와라 히데지로(荻原秀次郞) 경부(警部)가 전주화약(全州和約) 직후에 전주⬝태인⬝고부⬝부안⬝김제⬝금구 등지 동학농민군 동향을 정탐하여 우치다 사다즈치(內田定槌, 1865-1942) 영사에게 보고한 내용을 전재한 것이다. 이 보고에 따르면, 오기와라 경부는 1894년 6월 21일 육로로 서울을 출발하여 6월 25일에 전주에 도착, 2일간 전주 일대의 상황을 정탐한 다음, 6월 27일 전주를 떠나 태인에서 1박하고, 6월 28일에는 고부와 부안을 정탐하였으며, 6월 29일에는 김제와 금구를 둘러보았다. 이후 오기와라 경부는 충청도 공주(公州)를 경유하여 7월 4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7월 9일에 우치다 영사 앞으로 복명서(復命書)를 제출하였으며, 우치다 영사는 이 복명서를 7월 11일자 공신(公信) 제29호 문서로 주한일본공사관 특명전권공사 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 1832-1911) 앞으로 발송하였다고 한다. 이 복명서는『주한일본공사관 기록』제1권 411쪽부터 413쪽까지,『한글본 주한일본공사관기록』(1986)의 경우에는 제1권 110쪽에서 115쪽까지 실려 있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 발행되고 있던『미야코신문』(都新聞) 1894년 8월 2일자 1면에도 실렸고, 한 달 뒤에 간행되는『풍속화보』(風俗畫報) 제78호(1894년 9월 25일 발행) 10쪽부터 12쪽에도 실린 바 있다. 이상과 같은 동학농민군의 철저한 규율성에 대해서는 일찍이 김지하(1941-2022) 시인이「은적암기행」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한 바 있다.



황토재 전투에서부터 고부 백산을 거쳐 태인으로, 무장으로, 영광으로, (함평으로), 거 기서 다시 장성으로, 거기서 다시 전주로 회랑식 전투를 진행하면서 동학군이 보여준 철저한 규율성, 즉 어린이와 부녀자는 보호하고 병든 자는 고쳐주고 굶는 자는 밥 먹이 고 양반 서리들은 일단 징치한 뒤에 방면하고, 살생과 약탈을 금하고, 겁탈을 철저히 엄금했던 그와 같은 규율은 단순히 삼정문란(三政紊亂)이나 신분제적 질곡, 그리고 오 래된 적폐에 맞서 봉기한 무조직한 전통시대의 민중반란과는 전혀 양상을 달리하고 있 다는 점에 착안해야 합니다. 상당한 조직적인 근거와 장기간에 걸친 수양과 수련에 의 한 종교 조직적 통제력을 전제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측면입니다. (김지하, 『남 녘땅 뱃노래』, 1985, 171쪽)



그렇다면 동학농민군의 이 같은 높은 도덕성과 철저한 규율은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사람이 하늘(人卽天)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님 모시듯(事人如天)하라”는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1827-1898)의 가르침으로 무장되고 수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동학농민군 주력부대가 보여주었던 높은 도덕성과 철저한 규율의 근원은 바로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1824-1864)의 가르침인 시천주(侍天主) 사상, 즉 사람은 모두 자기 안에 신(神)과 같은 가장 거룩한 존재를 모시고 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시천주 사상에 따르면, 나도 상대방도 심지어 나와 싸우는 적(敵)마저도 하늘님을 모신 존재가 되기에 동학농민군은 “칼에 피를 묻히지 아니하고 이기는 것을 으뜸의 공으로 삼았으며”, “어쩔 수 없이 싸우더라도 사람의 목숨만은 해치지 아니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뿐만 아니라, “행진하며 나아갈 때에는 민가에 피해를 끼치지 아니하였고”, 심지어는 “쓰러진 보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놓고” 행진했다. 동학농민군의 바로 이런 모습이야말로 ‘혁명은 보듬어 안는 것’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혁명은 새로운 삶과 새로운 변화가 전제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혁명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전력으로 투구하는 높은 도덕성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31년 전. 1894년 갑오년 하늘에는 ‘보듬어 안는 혁명’에 헌신하던 동학농민군의 높은 도덕성과 철저한 규율이 하늘과 땅과 사람 모두를 감동시키고 있었다. /박맹수 원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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