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전통주의 향과 맛을 채우는 힘, 누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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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콤한 막걸리, 향긋한 전통소주. 우리가 사랑하는 전통주의 깊은 향미 속에는 발효의 비밀병기가 숨어 있다. 바로 누룩이다. 누룩은 곡물의 전분을 당으로 바꿔주는 효소를 지닌 당화제이자, 수많은 미생물이 공생하는 작은 발효 생태계다. 단순해 보이는 이 작은 덩어리 하나가 우리 전통주 문화의 정수이자, 술맛을 차별화하는 핵심 열쇠다.

우리 선조들은 수천 년 전부터 자연의 미생물을 이용해 누룩을 빚어왔다. 곡물을 빻아 성형한 뒤 발효시키면 곰팡이, 효모, 유산균 등이 어우러져 술맛을 완성한다. "집집마다 술맛이 다르다"는 말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누룩 속 미생물 군집과 환경 차이가 술맛의 차이를 좌우한다는 과학적 사실을 반영한 표현이다.

특히 우리 전통 누룩은 단일 곰팡이에 의존하는 일본의 입국(코지)과 달리, 다양한 미생물이 함께 작용해 복합적이고 깊은 풍미를 낸다. 누룩은 효소 제공을 넘어, 미생물 구성에 따라 생성되는 대사산물이 달라지고 이 차이가 술의 향과 맛을 결정짓는다. 이로 인해 같은 원료를 사용해도 누룩에 따라 과일향, 꽃향, 곡물향 등 각기 다른 풍미가 강조된다. 이처럼 누룩은 우리 술의 개성을 빚는 핵심 자산이자, 세계 어디서도 쉽게 모방할 수 없는 독창적인 고유 식문화다.

그러나 전통주 산업은 여전히 품질의 균일성과 소비자 신뢰 확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누룩에 기반한 자연 발효는 고유한 풍미를 선사하는 강점이 있지만, 제조 환경이나 미생물 조성에 따라 술맛과 품질에 편차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주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이러한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일정한 품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과학적 기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2008년 나고야의정서 시행 이후, 각국은 자국의 토착 발효 미생물을 전략 자산으로 보호하며, 수입 미생물에 대한 로열티 대응책을 마련해 왔다. 우리 누룩 속 토착 미생물도 전통주의 고유한 풍미를 이루는 핵심 자원이자, 미래 식품산업의 경쟁력 있는 소재다. 정부 역시 쌀 과잉 문제 해결과 K-푸드 세계화 전략의 일환으로 전통주 산업을 적극 지원하고 있으며, 누룩의 연구·산업화는 쌀 소비 촉진, 지역 농업 활성화, 전통문화 보존, 수출 경쟁력 강화로 이어지는 국가 전략과 맞닿아 있다.

농촌진흥청은 누룩의 다양성을 보완하면서도 고유의 특색을 살리기 위해 발효제 표준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미생물 군집과 효소 활성을 정밀 분석해 술맛을 안정화할 수 있는 지표를 마련하고, 막걸리 특유의 이취를 줄인 누룩 개발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특히 누룩 속 특정 미생물 구성에 따라 실제 술의 향과 맛이 달라지는 경향이 관찰되면서, 불쾌한 냄새를 줄이고 향미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기술은 젊은 소비자의 기호에 맞춘 제품개발과 전통주의 대중적 접근성 확대에도 기여할 것이다.

오랜 세월 다져진 선조들의 지혜 위에 발효과학이 더해지며, 누룩은 이제 더 안정적이고 정교하며 풍미 있는 술을 만드는 도구로 진화하고 있다. 작은 누룩 한 덩어리는 한국 전통주의 품격을 세계로 확장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누룩은 한국 발효문화의 뿌리이자 미래 산업을 여는 열쇠인 것이다. 전통을 토대로 과학과 문화, 산업을 아우르는 미래의 자산으로서 우리 술이 자리매김하길 기대한다./국립식량과학원 발효가공식품과 농업연구사 임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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