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Ⅰ. 마을의 숨결 속으로
장수군 계북면. 가을 들녘엔 벼 냄새가 감돌고, 굽이진 산길 끝 작은 마을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인구 1,500명 남짓, 그러나 이곳에는 수십 년 동안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준 한 남자가 있다. 계북면 지역사회보장협의체 민간위원장, 그리고 주민자치 부위원장, 원양교회 김재수 목사이다. 주민들은 그를 ‘계북의 등불’이라 부른다. “마을이 살아야 내가 삽니다.” 짧지만 그의 삶을 압축하는 한마디다.

Ⅱ. 시골에 남은 신학도&; ‘사명’으로 남은 자리
1955년 군산에서 태어난 김재수 위원장은 군산상고를 거쳐 전주한일장신대, 서울 한일신학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대부분의 동기들이 도시 교회로 나아갔을 때, 그는 1988년 겨울 눈 덮인 계북면 양악교회(현재 원양교회)로 부임했다. “당시 교회는 비가 새고 난방도 안 됐어요. 하지만 제 마음은 이상하게 따뜻했습니다. 여기가 제 사명지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는 이후 단 한 번도 도시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러 차례 대형교회의 제안을 받았지만 “마을이 살아야 교회도 산다”는 믿음으로 시골에 남았다.
Ⅲ.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는 마을, 계북면 지역사회보장협의체의 리더
김재수 목사, 맡은 또 하나의 직함은 계북면 지역사회보장협의체 민간위원장. 2021년부터 그는 ‘이웃이 이웃을 돌보는 복지’를 목표로 협의체를 이끌어왔다. 그가 주도한 사업은 계절별 맞춤 복지로 이어졌다.
여름철 냉방용품, 겨울철 난방유 지원, 명절 백미 나눔과 복맞이 삼계탕 행사, 거동 불편 어르신 가정 방문, 이웃愛 사랑愛 홈클리닝, 중증장애인 및 다문화가정 의류 지원 등 다양한 사랑나눔 행사를 추진하였다. 2025년 상반기에만 69가구가 지원을 받았고, 명절에는 백미 37포가 저소득층에게 전달됐다.
최근에는 치매로 한여름에도 두꺼운 패딩을 입는 치매 노인에게 춘추복을 지원해 멀리 있는 자식보다 낫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는 단순한 복지전달자가 아닌 주민 참여형 복지 시스템을 만든 장본인이다. “복지는 행정이 아니라 마음의 일입니다. 이웃의 손을 잡는 게 복지의 첫걸음이지요”
Ⅳ. 주민이 주인 되는 마을&; 주민자치의 변화
2005년, 그는 계북면 주민자치위원으로 위촉됐다. 당시 주민자치위원회는 형식적 조직에 불과했다. 그는 주민들에게 “주민이 주인이 되어야 자치가 시작된다”고 말하며 실질적 변화를 이끌었다. 그가 시작한 프로그램은 요가, 풍물, 난타, 문인화, 서예 등 문화교실로 이어졌다. 처음 북을 잡은 어르신들이 무대에 올라 북을 칠 때 그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순간, 마을의 에너지가 다시 뛰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현재 주민자치 부위원장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계북면 주민자치 프로그램이 장수군 발표회에서 매년 우수평가를 받고, 지역을 대표하는‘문화자치 모델’로 자리 잡는데 큰 공헌을 했다.

Ⅴ. 축제를 통한 지역 활력&; ‘토마토랑 수박 축제’의 성공
그의 리더십은 축제로도 이어졌다. 주민자치위원들이 주축이 된 ‘계북면 축제추진위원회’는 2023년 제1회 참샘골 토마토랑수박축제를 열었다. 작은 면 단위 축제였지만 주민 스스로 기획하고 운영하며 3,000여명이 찾는 지역대표행사로 성장했다. 2025년 제3회 장수가꿈 토마토랑 수박축제에서는 개막 인형극퍼포먼스가 큰 호응을 얻었고, 청년 및 어르신이 함께 참여하는 진정한 세대통합 축제로 평가받았다.
또한 그는 시골에 젊은 행사지원 인력 부족을 알고 30여 명의 봉사자를 모집해 축제를 지원했다. “우리가 만든 축제에 외지 사람들이 찾아오는 걸 보니 정말 뿌듯했어요” 한 주민의 말처럼 축제는 계북면의 자부심이 되었다.
Ⅵ. 복지의 거점 ‘원양봉사관’&; 나눔의 터전
1997년, 김 위원장은 스위스를 포함한 유럽 6개국을 사회복지 견학했다. 그곳에서 본 노인복지관의 풍경은 그에게 충격이었다. “우리 마을에도 이런 공간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귀국 후 그는 후원자를 찾아다니며 자금을 모아 원양봉사관을 건립했다. 이곳은 예식장, 의료봉사, 학습센터, 마을 잔치 공간으로 사용되며 지금도 주민들에게 ‘계북의 집’이라 불린다. 전주 수병원과 전주항외과 등 의료기관과 연계해 무료진료를 이어왔고, 성탄절마다 독거노인 25명에게 쌀과 부식비 500만원을 전달했다. 2001년에는 서울 영락교회로부터 의류 1,000벌을 기증받아 무료 나눔을 펼쳤다. “행사 때만 봉사하는 건 봉사가 아닙니다. 사람 곁에 늘 있어야 진짜 봉사지요”
Ⅶ. 아이들에게 희망을
그는 장학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15년간 원촌초등학교 학생 22명에게 장학금 220만원, 결식아동 27명에게 중식비 166만 원을 지원했다. 농번기에는 부모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도록 탁아교실을 열어 큰 호응을 얻었다. “그 시절 김 목사님이 없었으면 농사짓기 어려웠을 거예요” 마을 주민의 증언은 그의 존재가 단순한 종교인을 넘어 마을의 교육복지 기반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Ⅷ. 농가 소득의 길을 열다&; 도시와 연결한 직거래
김 위원장은 서울 관악노인회와 협력해 계북면 농산물 직거래를 추진했다. 1997년부터 2018년까지 자매결연지와 농산물직거래를 통해 표고버섯 160상자, 수박 16톤, 방울토마토 4톤, 장수한우와 고추장, 메주까지 도시 소비자에게 ‘청정 장수’의 이름으로 판매됐다. 농가 소득이 눈에 띄게 늘었고, 계북 농산물은 ‘신뢰의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이는 단순한 경제사업을 넘어 도시와 농촌의 상생 모델로 평가된다.
Ⅸ. 자연을 지키는 사람
그는 환경운동가이기도 하다. 1998년 이후 800여 명의 주민과 함께 50차례 이상 환경정화활동을 이끌었다. 여름마다 계곡과 유원지의 쓰레기를 치우며 ‘청정마을 계북’을 지켜왔다. “목사님이 앞장서서 쓰레기를 줍는 걸 보며 우리도 따라 나섰다”는 주민의 한마디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대변한다.
Ⅹ. 주민이 증언하는 ‘계북의 등불’
주민들은 그를 이렇게 말한다 “예배당에서는 목사님이지만 마을에서는 우리 어른입니다. 봉사라는 말보다 살림꾼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분이에요” 그는 전라북도지사 표창(2000년), 장수군수 감사패(2001년), 계북면민의 장(2006년)을 받았지만 상패를 꺼내놓는 법이 없다 “상보다 주민의 신뢰가 더 값집니다. 주민이 웃을 때, 그게 제 상이지요”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마을을 걷는 사람, 일흔을 넘긴 지금도 그는 여전히 바쁘다. 예배·상담·회의·봉사로 하루가 꽉 차 있다 “제가 한 일은 특별한 게 아닙니다. 함께 살아야 의미가 있고, 이웃이 웃어야 저도 웃습니다” 그의 발걸음이 멈추지 않는 한 계북면의 불빛도 꺼지지 않는다. 그는 오늘도, ‘우리 마을의 등불’이다.
/장수=유기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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