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한민족의 정체성을 다져 온 제천(祭天)의례는 오랫동안 왕권과 국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국가 제사로 수행되었다. 그러나 조선 왕국의 몰락과 일제강점기라는 격변의 시기, 한 지식인이 제천의례를 부활시켜 끊어진 역사를 전승하고, 의례의 핵심을 권위 중심에서 한민족 공동체의 삶 속으로 전환시켰다. 그는 1909년 단군교를 세우고 1910년 대종교로 개칭하여 창건한 홍암 나철(1863~1916)이다. 그에게 하늘제사는 한민족의 역사를 계승하는 동시에, 더 이상 왕실의 전유물이 아니라, 민중이 스스로 공동체의 도덕과 책임을 확인하는 공적 행위였다.
1916년 여름, 홍암은 당시 일제강점기 “정세의 불리와 시운의 부색함”을 통탄하며 음력 8월 4일 경성역을 떠나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왔던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로 향했다. 음력 8월 보름 새벽 1시, 역사적 성소에서 하늘에 제사드리는 제천의례인 ‘선의식’을 거행하였다.
홍암이 행한 제천의례의 현대적 의의는 분명하다. 첫째, 단절된 역사전통의 회복이다. 고대로부터 전승되어 오던 제천의례가 조선시대 중단되자 이를 회복하고 전승하였다. 전통사회에서 제천은 부여 영고, 고구려 동맹, 예 무천, 마한 시월제, 백제 교천, 고려 팔관회로 이어지는 국가의례였다. 당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한국의 역사·문화를 왜곡하고 단군서사를 ‘신화’로 축소하고, 국가 제례의 공간과 상징을 해체함으로써 민족의 연속성을 끊으려 했다. 홍암은 여기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민족의 정체성과 자존을 회복하는 길을 신앙·의례의 재구성에서 찾았다. 그 핵심은 단군을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신관 속에 위치시키고, 백두산 지역에서 활동하던 백봉의 단군전승을 계승해 교리체계를 정립한 일이다. 『삼일신고』·『신사기』 등 교서를 통해 단군의 역사를 정당화하고 제천의례를 행하였다. 고대의 '한' 사상을 수용하고, 한임ㆍ한웅ㆍ한검의 삼위일체적 신앙으로 체계화하였다. 홍암의 뜻을 이은 대종교의 단군신앙운동은 일제치하의 한국의 독립을 위한 무력투쟁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해방후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교육이념을 정립하는 토대가 되었다.
둘째, 권위 중심의 의례를 시민중심의 의례로 전환하였다. 권위의 상징이던 국가의례를 시민참여의 의례로 재구성함으로서, 공동체의 주권을 ‘왕’에서 ‘민중’으로 회복했다. 그는 제천의례를 대종교 교인과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는 의례를 주관함으로써 ‘혈통의 신성’이나 ‘권력자의 의례’가 아니라 민중이 책임져야 할 ‘공동 선’에 대한 실천으로 재해석하였다. 이는 조선후기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적 중화주의(中華主義)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천손(天孫)의 자손으로서 세계 인류의 중심이며, 독립국가로서의 민족적 자존성을 높인 것이다. 하늘의 자손이라는 천손 의식을 공공윤리로 해석하여, 모든 인종의 ‘하늘 앞의 평등’과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셋째, 희생을 통한 공공윤리의 천명이다. 홍암이 제천의례인 선의식을 행한 후 「순명삼조(殉命三條)」와 유서를 남기고 호흡을 멈추는 폐기법으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대종교를 위해서, 한배검을 위해서, 천하동포의 죄를 대신 받기 위해 자기희생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당시 대종교와 한민족의 위기상황에서 자기희생을 통해 민족의 안녕과 인류공동체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홍암의 단군신앙운동과 제천의례는 역사의 주체를 왕정의 군주에서 민중으로 돌리고, ‘신앙-의례-윤리’의 연쇄를 통해 정신적 동력을 제공하였다. 특히 팔관재·구서·삼법으로 대표되는 규범 체계는 제천의례의 핵심을 이룬다. 살생·망언의 금지, 절제와 정성의 훈련, 몸과 마음의 정화는 ‘하늘의 경건’에 머무르지 않고 ‘나와 서로를 위한 공경과 절제’로 확장된다.
의례 참여자가 스스로 금기·재계를 엄격히 요구했으며, 이를 통해 ‘한임·한웅·한검’에게 경건한 마음으로 의례를 행하며 한민족의 정체성과 독립성을 보여준 것이다. 더 나아가 ‘홍익인간’의 교육이념 정립은 한국전통의 사상과 윤리가 곧 지구촌의 보편적 사상과 윤리가 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홍암의 제천의례와 희생정신은 오늘날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혐오와 불신을 넘어, 우리 모두의 공공선을 향한 책임과 품격 회복을 요구한다.
/박광수(원광대학교 명예교수, K-전통문화학술원 이사장)
전북을 바꾸는 힘! 새전북신문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