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창시자인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1861년 6월부터 본격적인 포덕활동을 시작했으나, 경주 관아로부터 탄압을 받자 남원으로 이주했다. 그해 12월 말 교룡산성 안에 있는 선국사(善國寺)의 한 암자를 빌려 은적암(隱蹟庵)이라 이름 짓고 수도를 계속했다. 최제우가 은적암에서 숨어 지낸 8개월이 남접(南接)의 시작이 됐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당시 김개남이 집강소를 설치했던 곳이 선국사였다.
최제우는 울분에 찬 마음을 안고 울산과 고성을 거쳐 여수를 지나 구례를 거쳐 경주를 떠난 지 2개월만인 12월 15일경 남원에 이르렀다. 그가 이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광한루 밑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던 서형칠(徐亨七)이었다. 그를 찾아간 것은 경주를 떠날 때 약종상을 하던 최자원(崔子元)으로부터 받아온 귀한 약재를 팔기 위해서였다.
이때 양형숙(梁亨淑), 양국삼(梁局三), 서공서, 이경구(李敬九), 양득삼(梁得三) 등이 최제우를 만나 동학에 입문했다. 이것이 남접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10여 일이 지난 후 서형칠이 최제우를 교룡산성의 조용한 암자인 덕밀암으로 모셨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에서는 그 당시의 상황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법경을 외워 소원을 축원하며 새벽 불공을 드렸다. 송구영신의 회포와 감회를 금치 못하면서 외로운 등불 아래서 한밤을 지샜다'
최제우는 은적암에서 숨어 지내면서 동학을 수도하고 포교와 저술 활동을 이어나갔다. 나중에 동학농민혁명의 주력이 되는 호남포의 포덕 씨앗이 뿌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남원 교룡산성공원 내 '동학성지 남원'비는 2005년 11월 남원문화원과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주도로 건립됨. 비의 형태는 등잔과 호롱불 모양을 하고 있다. 기념물 앞 석물에는 최제우가 이곳에서 수도하는 중 자주 불렀다는 '칼노래(劍歌)'가 새겨져 있다. 현재 용담검무는 이를 계승한 남원시 무형유산으로 장효선 보유자가 전승자로 지정돼있다.
은적암(덕밀암)을 복원해야 한다는 지적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은적암은 만해 스님과 함께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불교대표로 서명했던 백용성 스님이 출가해 호국불교를 발전시킨 곳이기도 하다. 스님은 14세때 출가한 뒤 은적암에 머물며 불법을 배웠고, 만해 한용운 선생과 함께 불교 부흥과 민족의 장래를 논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최제우는 동학의 단위 조직인 접을 만들면서 동학을 전파하다가 1863년 12월 10일 새벽, 구미산 자락 용담골에서 체포됐다. 1864년 3월 10일 대구 장대에서 유교의 가르침을 어지럽히고 나라의 정치를 문란케 했다는 죄목에 의하여 처형됐다. 그때 남원에서 지은 '칼노래'가 죽음을 당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경주와 남원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공통 분모를 갖고 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치러지는 국제행사이자 2005년 부산에 이어 20년 만에 대한민국 경주를 무대로 펼쳐지는 세계적인 외교행사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는 이제 전 세계 정상들을 맞이할 막바지 준비로 분주한 모습이다. 이번 APEC에 남원 용담검무를 초청, 공연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이종근(문화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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