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록』(日本 京都大學 圖書館 河合文庫 所藏)에 실려 있는「무장포고문」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왜 혁명이라 부르는가? 혁명을 이끌고 지도했던 사상이 존재했고, 혁명을 위한 준비 기간이 있었으며, 혁명을 이끄는데 필요한 조직적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동학농민혁명 최고 지도자 전봉준은 1894년 음력 3월 20일경, 당시 전라도 무장(茂長)에서 혁명의 대의를 전국으로 알리는「무장포고문」(茂長布告文)을 선포한다.
「무장포고문」은 전봉준이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설에는 전봉준의 참모가 썼다는 견해도 있다. 작성자가 누구였든「무장포고문」에는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 지도부의 당면한 시국인식(時局認識)을 비롯하여, 비합법 무장봉기(武裝蜂起)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적 이유, 민초들의 생명(生命)과 생업(生業)&; 생활(生活)을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던 조선왕조 지배체제의 모순을 변혁하고자 하는 강력한 혁명 의지, 그리고 그 같은 취지에 공감하는 지지층의 연대와 협조를 촉구하는 내용이 감동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특히 131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날의 시대적 모순과 그대로 일치하는 부분들이 많아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치게 만드는 명문(名文)이다.
종래, 학계에서는「무장포고문」의 포고 시기를 둘러싸고 정확한 고증을 거치지 않은 견해들이 난무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일제강점기에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유학하여「동학과 동학란」이란 학부 졸업논문을 쓴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선생의 경우이다. 선생은 1975년에 학부 졸업논문을 보완한『동학과 동학란』(한국일보사)을 냈는데, 그 책 116-119쪽에서 포고 시기를 1894년 1월로 잘못 서술하고 있다. 잘못 고증한 사례는 더 있다. 후래 연구자들의 전봉준 연구에 영향을 끼친 김의환(金義煥, 1925-1992)의『전봉준 전기』(정음사, 1981)의 97-100쪽과 재일(在日) 사학자 강재언(姜在彦, 1926-2017)의『한국근대사연구』(한울, 1982) 168-169쪽에서는 동학농민군이 갑오년 1월에 고부에서 봉기한 뒤 정읍(井邑)과 흥덕(興德)을 거쳐 무장현(茂長縣)을 점령했던 1894년 4월 12일경에 포고한 것으로 잘못 기술하고 있다. 이 같은 오류는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바로 익산 (益山) 지역 농민군 지도자였던 오지영(吳知泳, 1868-1950)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동학사』(초고본 1926, 인쇄본 1940)에서 포고 시기를 갑오년 3월이 아닌 1월에 포고된 것으로 잘못 기술한 데서 비롯되었다.(『동학사』, 영창서관, 1940, 108-109쪽 참조)
오지영을 선구(先驅)로 그 뒤를 이은 동학 연구자들이「무장포고문」포고 시기를 3월이 아닌 1월 또는 4월로 오해한 이유를 정리하면 첫째, 관련 사료에 대한 치밀한 검토 없이 동학농민군의 전면 봉기 장소를 무장(茂長)이 아닌 고부(古阜)로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다. 둘째, 갑오년 1월 10일의 고부민란(古阜民亂) 즉 고부농민봉기를 3월 21일의 무장기포(茂長起包) 즉 제1차 동학농민혁명과 별개의 봉기로 이해하지 못하고 1월에 이미 전면 봉기가 시작됐다고 오해한 데서 비롯되었다.
「무장포고문」은『동학사』를 필두로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의『오하기문』(梧下記聞), 경상도 예천(醴川) 출신 유생 박주대(朴周大, 1836~1912)의『나암수록』(羅巖隨錄), 관변 기록『동비토록』(東匪討錄), 1893년에서 1894년에 걸쳐 충청도 보은 관아에서 농민군의 동정을 탐지하여 수록한『취어』(聚語), 전라도 무주 관아에서 수집하여 남긴『수록』(隨錄),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서울 명동성당에 주재하며 동학 관련 문서를 수집했던 뮈텔(Mutel, 1854-1933) 주교의「뮈텔문서」(천주교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일본인 파계생(巴溪生)이 쓴「전라고부민요일기」(全羅古阜民擾日記) 등에 실려 있다.
『동학사』에는 국한문(國漢文)으로,「전라고부민요일기」에는 일본어로 실려 있으며, 나머지 사료에는 모두 한문(漢文)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취어』에는 405자,『수록』에는 400자의 한자로 되어 있으나 내용은 동일하다.

오지영『동학사』(영창서관, 1940) 겉표지와 속표지

「무장포고문」 포고 시기가 ‘갑오(1894년) 정월)’로 잘못 기술된 『동학사』
동학농민혁명이 지향하는 혁명의 대의를 담은「무장포고문」중에서도 가장 주목해야 할 혁명의 이념은 무엇일까? 바로 ‘보국안민’(輔國安民)이다. 「무장포고문」에서 강조되고 있는 ‘보국안민’ 관련 부분을 인용한다.
일찍이 관자(管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유(四維), 즉 예의염치(禮義廉恥)가 떨치지 못하는 나라는 결국 망한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형세는 그 옛날보다도 더 심하기 그지 없으니, 예를 들면 지금 이 나라는 위로 공경대부(公卿大夫)로부터 아래로 방백수령(方 伯守令)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나라의 위태로움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자기 몸 살찌우 고 제 집 윤택하게 할 계책에만 몰두하고 있으며, 벼슬길에 나아가는 문을 마치 재화가 생기는 길처럼 생각하고 과거시험 보는 장소를 마치 돈을 주고 물건을 바꾸는 장터로 여기고 있으며, 나라 안의 허다한 재화(財貨)와 물건들은 나라의 창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의 창고만 채우고 있다. 또한, 나라의 빚은 쌓여만 가는데 아무도 갚을 생 각은 하지 않고, 그저 교만하고 사치하며 방탕한 짓을 하는 것이 도무지 거리낌이 없어 팔도(八道)는 모두 어육(魚肉)이 되고 만백성은 모두 도탄에 빠졌는데도 지방 수령들 의 가혹한 탐학(貪虐)은 더욱 더하니 어찌 백성들이 곤궁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성들은 나라의 근본인 바, 근본이 깎이면 나라 역시 쇠잔해 지는 법이다. 그러니 잘 못되어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 방책(輔國安民之方策)을 생각하지 않고 시골에 집이나 지어 그저 오직 저 혼자만 온전할 방책만 도모하고 한갓 벼슬자리나 도 둑질이나 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올바른 도리라 하겠는가.
우리 동학농민군들은 비록 시골에 사는 이름 없는 백성들이지만 이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이 땅에서 나는 것을 입고 사는 까닭에 나라의 위태로움을 차마 앉아서 볼 수 없 어서 팔도가 마음을 함께 하고 억조(億兆) 창생들과 서로 상의하여 오늘의 이 의로운 깃발을 들어 잘못되어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 것(以輔國安民)을 죽음 으로써 맹세하노니, 오늘의 이 광경은 비록 크게 놀랄 만한 일이겠으나 절대로 두려워 하거나 동요하지 말고 각자 자기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여 다 함께 태평성대를 축원하고 다 함께 임금님의 덕화를 입을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노라.
「무장포고문」에서 두 차례 나오는 ‘보국안민’이란 말은 “잘못되어가는 나라를 바로 잡아 백성들을 편안히 만든다”는 뜻이다. ‘보국안민’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보(輔) 자에 있다. 보(輔) 자는 지킬 보(保) 자나 갚을 보(報) 자와는 뜻이 다르다. ‘도울 보’ 또는 ‘잘못 바로잡을 보’로 읽는 보(輔) 자 속에는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체적으로 나서서 나라의 잘못을 바로잡아 더욱 건강하게 만든다는 뜻이 들어 있다. 현대적 표현을 빌리자면,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체가 되어 자신이 속해 있는 국(國)이라는 공동체를 한 단계 더 바람직한 차원으로 바꾸어간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시민주권(市民主權)과도 상통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무장포고문」에서 강조된 ‘보국안민’이란 혁명 사상은 ‘녹두장군’ 전봉준의 최후진술이 담긴「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 서울대 규장각 소장)에서도 거듭 강조되고 있다. (아래 사진 참조) 그리고 이 ‘보국안민’은 『동경대전(東經大全)』 「포덕문」(布德文)에서 유래한다.

전봉준이 동학이란 ‘수심경천과 보국안민의 도학’이라 답한 부분(전봉준공초)
문(問) : 동학(東學)이라는 것은 무슨 주의(主意), 무슨 도학(道學)인고?
공(供) : 수심(守心)하여 충효(忠孝)로 근본(根本)을 삼아 보국안민(輔國安民)하자는 일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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