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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에 시달리던 제주도민을 구한 김낙철 대접주(1858-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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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낙철 대접주 내외 사진



김낙철은 부안김씨(扶安金氏) 출신으로 1858년에 지금의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봉덕리 쟁갈마을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여중(汝仲)이요 낙철(洛喆)은 이름이며 용암(龍菴)은 동학의 도호(道號)이다.

그는 동생 낙봉(洛鳳, 字 明仲), 낙주(洛柱, 字 明眞) 및 사촌 동생인 낙정(洛貞), 낙용(洛庸) 등과 함께 1890년 6월에 동학에 입도하였고 7월부터는 포교 활동에도 나섰다. 그결과 이듬해 3월 무렵에는 따르는 교도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1891년 3월에는 부안 옹정(甕井)의 김영조(金永祚)와 동생 낙봉, 무장(茂長)의 손화중(孫化中)과 함께 충청도 공주 신평에 머물고 있던 해월 최시형을 찾아가 직접 지도를 받았다. 이리하여 1890년대 초반, 전라도 부안에서는 부안김씨 가문이 동학을 수용하고 포교 활동을 전개한 덕분에 불과 1년 안에 교도 수가 수천 명에 이를 정도로 동학 교세가 탄탄하게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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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철 자서전『김낙철역사』가 실려 있는 두 권의 책. 왼쪽의 학산 정갑수는 김낙철 대접주의 사위



김낙철이 해월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을 때 무장의 손화중 등과 동행했다는 사실은 그가 동학농민혁명 이전부터 부안 이외 전라도 지역 동학 지도자들과 연락망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며, 해월이 부안을 찾아 포교 활동을 벌인 사실은 부안 지역 동학 교세가 성장 일로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1892년부터 1893년까지 2년여에 걸쳐 전개된 동학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은 동학농민혁명의 전사(前史)를 이룬다. 교조신원운동은 첫째 동학 교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달라는 요구, 둘째 동학 포교를 금지한다는 핑계로 동학 교도와 일반 민중들의 재산을 수탈하는 지방관들의 부당한 행위를 막아 달라는 요구, 셋째 나날이 만연하고 있는 서학(西學)과 일본 상인의 불법적인 상업 활동을 막아내자는 요구를 내걸고 전개되는데 이것은 동학교도들의 요구인 동시에 당시 일반 민중들의 요구이기도 했다. 김낙철 역시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했다. 즉



계사년(1893) 3월에 큰 선생님(수운 최제우)의 신원을 하러 동생 낙봉과 김영 조, 교도 수백 명이 함께 서울(복합상소)에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 다. 그때 나는 전라도 내의 도도집(都都執)을 맡고 있었다. (김낙철역사)



위의 내용에 따르면, 김낙철은 동생 낙봉, 김영조와 함께 교도 수백 명을 이끌고 상경하여 광화문 복합상소에 참여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내려왔다는 것이다. 한편, 김낙철의 동생 김낙봉은



계사년 봄 서울 광화문 복합상소에 참여하였고, 연이어 보은 장내 집회(보은집회)가 있었기에 고산(高山) 등지로 올라갔다가 해산하라는 명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돌 아왔다.(김낙봉이력)



라고 하여 김낙철 등이 광화문 복합상소 직후에 열린 보은집회에도 참여하고자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선행 연구는 “일련의 교조신원운동 전개 과정에서 남접 계열의 전봉준 등이 지도부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이들은 해월 중심의 북접 계열과는 일정하게 노선을 달리하고 있었다”고 말해 왔다.(정창렬과 조경달 등) 그러나,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광화문 복합상소나 보은집회에 해월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에 있던 동학 지도자들 역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따라서 동학의 남북접(南北接) 대립의 출발이 교조신원운동 단계부터였다고 하는 선행 연구는 마땅히 수정되어야 한다.

1894년 3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무장(茂長)에서 전면 봉기함에 따라 제1차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었다. 김낙철은 처음에는 전봉준의 본의를 알기 어려워 동생 낙봉을 해월에게 보내 대응책을 물었다. 소식을 접한 해월은 “이 또한 시운이니 금지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전봉준의 봉기를 사실상 용인(容認)하였다. 이것은



선생은 진노한 안색을 띠고 순 경상도 어조로 외쳤다. “호랑이가 물자고 들어 오면 가만히 앉아서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서 싸우자.” 선생의 이 말이 곧 동원령이다.(백범일지)



최법헌(=최시형)이 돌린 통문 내용 안에 “호남의 그 무리들이 한꺼번에 타살 당하는 것을 앉아서 기다릴 수 없으니 (4월) 초 6일에 청산 소사전으로 모이 라고 했다”고 한다. (동비토록)



이라는 내용과 함께 제1차 봉기 당시 해월의 행적에 대해 재조명할 것을 요구한다. 제1차 동학농민혁명에 즈음하여 김낙철은 4월 1일에 부안에서 봉기한다. 그는 부안 서도면 송정리 신씨제각(西道面 松亭里 辛氏祭閣)에 도소(都所)를 설치하는 한편, 동생 낙봉과 신소능(申小能)에게는 줄포(茁浦)에도 도소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전봉준의 제1차 봉기에 호응하였지만 김낙철은 전봉준과는 별개로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부안에 머물며 관내 치안 유지에 전념한 것이다. 김낙철의 ‘독자적’ 활동은 집강소 통치기에 빛을 발하게 된다.

집강소(執綱所)란 동학농민군의 자치기구로써 ‘도소’(都所)로 불렀다. 집강소는 동학농민군이 ‘전주화약’을 체결한 직후인 5월 중순부터 전라도 53개 군현 외에도 충청도와 경상도, 경기도와 강원도 일부에도 설치되었다. 한 고을에 하나의 집강소가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2개 이상이 설치되는 고을도 있었다. 부안의 경우는 서도면 송정리(西道面 松亭里; 현재의 부안군 행안면 송정리)와 줄포(茁浦) 두 곳에 설치되었다. 집강소는 농민군의 세력 여하에 따라 농민군이 주도하는 집강소, 농민군과 고을 수령이 서로 타협하여 설치하는 집강소, 반농민군 세력이 설치하는 ‘보수’ 집강소 등 세 종류가 있었는데, 부안에 설치된 집강소는 부안 현감 등의 요청을 받아들여 관내 치안 유지를 위해 설치했다는 점에서 ‘타협적인’ 집강소임을 시사한다.

‘타협적인’ 집강소의 특징은 해당 고을 관내에서 농민군과 반농민군 세력 간의 충돌이 없어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고 무뢰배(無賴輩)에 의한 약탈 행위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은 부안에 설치된 집강소 활동에서도 확인된다. 부안은 고부(古阜)와 백산(白山), 황토현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관내 치안이 잘 유지되었다. 그리하여, 부안 줄포(茁浦)로 쌀을 구하러 온 제주도 어민들이 무사히 쌀을 구함으로써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해 있던 제주도민들이 살아날 수 있었다.



제주도가 계사 갑오 두 해에 홀로 큰 가뭄을 만나 경내 몇만 명 생령들이 거 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 생선 등을 싣고 전라도 각 포구에 이르러 곡식과 바꾸 려고 할 즈음에 (중략) 오직 부안의 각 포구에서는 혹시라도 탁란군(濁亂軍; 농민군을 빙자한 무뢰배)에게 물건을 빼앗기면 김 모(김낙철)가 즉시 사람을 보내어 추급(推給; 물건값을 일일이 셈하여 지불함)했기 때문에 단 한 홉의 곡 식도 잃어버리지 않아 제주 경내 인민들이 부안군의 쌀과 보리로 모두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 이것은 바로 김모(김낙철) 형제의 덕화가 아니겠습니까. (김낙철역사 및 김낙봉이력)



제주도민들을 굶주림에서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김낙철이 설치한 부안 집강소가 관내 치안을 안전하게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김낙철이 집강소를 설치했던 신씨제각은 지금도 남아 갑오년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아래 사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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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씨제각. 2006년 1월 6일 필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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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철 질품서」, 광무 2년(1898) 5월 1일





전봉준의 제2차 봉기 때 김낙철은 동모자(同謀者)로 참여했다.(전봉준 판결 선고서) 김낙철은 동학농민혁명 ‘동모자’로서 1894년 12월 11일 부안에서 체포되어 나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이듬해 3월 무죄 석방되었다. 이후, 동학 재건 활동 중에 스승 해월을 대신하여 1898년 1월 4일에 다시 체포되었다. 위의「질품서」에 두 번째 체포되어 재판받은 내용이 실려 있다. 1917년에 서거. 충남 논산군 은진면 남산리 산 37-10에 묘소가 있다. /박맹수 원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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