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날달 30일 오전 전주 에이옥션(미술관 솔)에서 본 채용신 '노부인상(비단에 채색)'에 반구 부채가를 보았다. 기자가 반구 부채를 든 한국의 작품을 본 것은 처음이다. 편집자
'반구 부채'는 '방구 부채' 또는 '단선(團扇)'이라고 불리는, 자루가 달린 둥근 모양의 전통 부채를 가리킨다.
반구(盤盂) 부채'의 한자는 &;盂扇이다. '반구(盤盂)'는 둥근 모양을 의미하며, 조선시대 접부채(쥘부채)와 함께 부채의 양대 종류 중 하나이다.
자루가 달리고 부채의 모양이 둥근 것이니, 이를 한글로 '방구 부채'라고 한다.
'방구'란 둥글다는 뜻이다. 방패연의 둥근 구멍을 방 구멍이라 하고 둥근 모양의 울리는 종을 방울이라 하듯이 붙여진 이름이다.
이 작품은 그가 1929년에 그렸다. 왼편을 보면 기사(己巳)년 봄에 채용신이 그렸다는 한문이 보인다.
무엇 때문에 이 여인은 부채를 들고 있나.
어진 화가 채용신이 그린 여인들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통상 여인들의 초상화가 작품이 드물어 가격이 상당히 높게 책정된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주인공은 왕이나 고관대작 등 남자만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채용신이 활동하던 무렵에는 부농의 아내 등 여성도 당당히 초상화의 모델이 됐다.
채용신이 82세 되던 1932년에 그린 ‘노부인 초상’(비단에 채색, 98×56㎝, 국립현대미술관 제공)은 대지주의 노부인이 의자에 앉아 화가 앞에서 포즈를 취한 모습이다.
자세가 자못 당당하다. 조선시대 고관대작이나 가질 수 있던 초상화의 주인공이 됐으니 남부러울 것 없다는 태도다.
쪽찐 머리, 외꺼풀 눈, 꽉 다문 입매에서 많은 소작농을 거느렸을 부농의 안주인이 갖는 자부심마저 느껴진다.
목 뒤로 드러난 금비녀, 무릎 위에 얌전히 얹힌 손에 낀 금반지, 치마 아래 살짝 보이는 가죽신을 통해 자연스럽게 부를 과시하는 구도를 취했다.
흰 비단 치마저고리는 노년 여성의 기품을 살려주고 저고리 밑으로 뺀 복주머니 모양 붉은 노리개와 푸른색 줄의 색깔 대비가 싱싱해 노부인의 나이를 몇 살이라도 젊어 보이게 하는 효과를 낸다.
20세기 초 최고의 초상화가로 인기를 누리던 석지(石芝) 채용신(1850~1941)이 전라도에서 한 부농의 아내를 그린 작품이다. 칠순 등 특별한 날을 기념해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초상화를 그리는 값은 전신상에 100원, 반신상에 70원이었다. 그 무렵 임실에서 소 한 마리를 82원에 거래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농가의 보물인 소 한 마리는 갖다 바쳐야 초상화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채용신은 당시로선 드물게 91세까지 장수했는데, 기량이 무르익던 말년의 대표작인 이 그림은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됐다.
'노부인상’은 서구 근대 문명이 수용되던 시기에 서양의 명암기법과 동양의 세필묘사를 융합해 독창적 초상화의 세계를 연 채용신이 79세이던 1929년에 그렸다.
채용신은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원래 무관 집안으로 전주에 살았다. 할아버지 때부터 서울로 이사해 살았다. 그 역시 36세이던 1886년 비교적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해 의금부 도사 등 여러 관직을 지냈고 49세 때이던 1899년 수군첨절제사를 마지막으로 무관에서 물러났다. 이후 고향인 전주로 물러나 지내던 그를 조정에서 선원전(창덕궁 안에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신 곳)에 걸 태조어진을 그릴 화사로 불러들였다. 무관으로 평생을 살아온 채용신은 그렇게 해서 어느 날 갑자기 어진 모사를 주관하는 주관 화사로 발탁됐다. 구한말 3대 화가로 꼽힌 조석진과 함께였다는 점에서 낭중지추였던 실력이 상상된다. 1900년 그의 나이 오십이었다. 무관으로만 살아오던 채용신의 그림 실력은 도대체 어떠했을까.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고 그림 팔아 빚을 갚기도 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태조어진이 완성되자 흡족했던 고종은 자신의 어진과 함께 16명의 기로소(조선시대 70세 이상 연로한 고위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 신료들의 초상화를 제작하게 했다. 덕분에 1905년 충남 정산군수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작품을 보면, 1920년대부턴 초상화의 주인공으로 부농이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나이가 많아 아이를 가질 순 없지만 부부 초상화를 함께 갖기를 원했다. 조선시대 초상화 전통에선 있을 수 없던 일이 일어난 것다.
‘노부인 초상’처럼 여성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채용신 초상화에는 ‘서병완 부부 초상’(1925) ‘황장길 부부 초상’(1936) 등 남편과 아내가 각각 초상화를 제작한 사례도 있다. 돈의 힘은 그렇게 무섭다.
70대에 들어서며 기력이 떨어진 채용신은 1920년대에 정읍 신태인에 거처를 마련해 ‘채석강도화소’를 차렸다.
간판 이름에서 마케팅 감각이 느껴진다. 채석강도화소의 석강(石江)은 고종이 내려준 호다.
‘연전에 높은 구중궁궐에서 임금을 모실 적에, 나의 호를 바꾸어 내려주사 송구스러운 느낌 남아있네. 특히 ‘강’(江) 이름을 가리켜 깨끗한 경치로 허여하시고, 그대로 ‘석(石)’ 글자를 남겨 두어 절개가 굳다고 논하셨다. 남은 인생 어찌 시선(詩仙)의 취미를 본받겠는가? 노쇠함에 따라 성주(聖主:고종)의 은혜를 잊지 어렵도다. 지난 일 지금에 흘러간 물처럼 탄식되는데, 종남산(終南山:남산) 빛은 저녁 구름에 어둡구나.’ 석강이라는 호를 내린 고종황제를 그리워하며 읊은 것으로 석강실기(石江實記)에 수록된 채용신의 시이다.하자 “네가 사는 곳이 부안에 가까운데 그곳에 채석강이 있지 않은가. 호를 석강이라 하라”고 명했다.
‘연전에 높은 구중궁궐에서 임금을 모실 적에, 나의 호를 바꾸어 내려주사 송구스러운 느낌 남아있네. 특히 ‘강’(江) 이름을 가리켜 깨끗한 경치로 허여하시고, 그대로 ‘석(石)’ 글자를 남겨 두어 절개가 굳다고 논하셨다. 남은 인생 어찌 시선(詩仙)의 취미를 본받겠는가? 노쇠함에 따라 성주(聖主:고종)의 은혜를 잊지 어렵도다. 지난 일 지금에 흘러간 물처럼 탄식되는데, 종남산(終南山:남산) 빛은 저녁 구름에 어둡구나’
석강이라는 호를 내린 고종황제를 그리워하면서 읊은 것으로 '석강실기(石江實記)'에 수록된 채용신의 시이다.
공방 이름에 고종이 내린 호를 쓴 것은 어진화사 출신이라는 자신의 브랜드를 강조하는 효과도 있다.
도화소는 일종의 가족공방으로 아들 손자와 함께 온 집안이 동원돼 초상화 주문 제작에 응했다. 막내아들은 초상화 주문을 받으러 돌아다니고 완성되면 큰아들이 고객의 접대와 전송을 담당했다. 특히 손자 규영은 그림 실력이 좋아 채용신과 합작 초상화도 남겼다.
초상화 주문이 들어오면 계약을 하고 선금을 받은 후 제작했다. 그리는 데는 두 달 정도 걸렸다. 광고 전단도 돌렸다. 광고 전단엔 어진화사 출신이라는 이력과 함께 초상화 가격을 명기했다. 흥미로운 것은 초상화 제작 때 사진을 보내주되, 없으면 사진사를 보내 찍어주겠다고 명기한 것이다. 아들 중에 사진사도 있었다고 한다.
그의 며느리는 이를 위해 사진을 배웠다.
채용신의 초상화는 사진 같으면서도 전통 초상화의 기법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전통 초상화가 갖는 신분 상승감을 동시에 준다. ‘노부인 초상’을 보면 옷 주름과 얼굴과 목의 경계에는 명암을 넣어 서양화 기법을 쓰면서도 얼굴 피부 표현에서는 가는 붓을 무수히 그어서 깊이감을 만들어낸다.
르누아르의 '부채를 든 소녀'란 작품에도 반구 부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부채를 든 소녀(1879, 프랑스, 작품소장: 클락 아트 인스티튜트)'가 있다.
'부채를 든 소녀'는 ‘벨 에포크‘ 시대를 담은 그림으로 그림 속 여인은 잔 사마리로 파리에서 모델과 배우로 활동했다. 한때 연인 관계였던 잔 사마리를 르누아르는 4점의 초상화에 남겼다.
잔 사마리는 33세의 젊은 나이에 병에 걸려 사망한다.
'부채를 든 소녀'는 르누아르의 대표작 중 하나로 미국 클락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소장하고 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는 프랑스의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반짝이는 색채와 빛을 통해 삶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았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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