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한가운데]마한(馬韓)의 소도(蘇塗)와 백제(百濟)의 교천(郊天) - 전라북도의 미래를 여는 문화전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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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의 뿌리이며 공동체를 지탱하는 정신적 토대다. 전라북도는 인류의 고대사 속에서 구석기와 신석기의 생활 흔적이 쌓여 있는 땅이며, 고창의 고인돌문화로 대표되는 세계적 선사 유산을 간직한 곳이다. 이어 마한의 소도(蘇塗)와 백제의 교천(郊天) 등의 전통은 단순한 종교 의례를 넘어 공동체 결속과 삶의 질서를 지탱한 정신적 기둥이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은 마한 사회의 독특한 종교 문화를 생생히 전해준다. 기록에 따르면 마한에는 천군(天君)이라 불리는 제사장이 하늘에 제사를 주관했으며, 소도(蘇塗)는 국읍과는 별도로 ‘별읍(別邑)’이라 불릴 만큼 독립적인 성격을 지닌 신성 공간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사람들이 소도를 불교의 부도(浮屠)에 비유하면서도,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사실이다.

소도의 상징은 솟대였다. 나무에 새 모양 장식을 달아 세운 솟대는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표식이었고, 방울과 북을 단 현령고(縣鈴鼓)는 신과 사람을 잇는 매개체였다. 의례가 열릴 때 울려 퍼졌을 북소리와 방울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신성한 세계와 인간 공동체가 교감하는 과정이었으며, 제의에 참여한 사람들은 무리 지어 모여 노래와 춤을 즐기는 축제의 장이었다.

백제 시대에 들어서면 제천의례는 더욱 제도화되고 국가적 차원에서 정례화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비류왕 10년(315) 정월, “남교(南郊)에서 천지에 제사하니, 왕이 친히 희생을 베었다”(祀天地於南郊 王親割牲)라는 기록이 전한다. 근초고왕 2년(347) 정월에는 “천지신기(天地神祇)에 제사하였다”(祭天地神祇)라고 적고 있다. 하늘에만 제사를 올린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 그리고 신령들에게 함께 제사를 올렸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백제 사회에는 천신을 곧 조상신으로 여기는 전통이 있었다. 중국의 교사(郊祀) 제도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그대로 모방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 전통을 반영해 하늘과 땅을 따로 나누지 않고 함께 제사하는 ‘천지합제(天地合祭)’라는 독자적 형태를 발전시켰다. 이는 단순한 의례적 절차가 아니라,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이 하나의 질서 속에서 공존한다는 세계관의 표현이라 여겨진다.

조선 숙종 15년(1689)에 건립된 부안 지역의 석조신간(石鳥神竿)은 돌장승과 솟대 모양의 돌기둥이 결합된 독특한 구조물로서 솟대 신앙이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부안의 마을 사람들은 이 돌장승과 돌기둥을 신으로 모시며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 자정을 전후해 당산제를 지내오고 있다. 솟대 신앙은 이렇게 민속신앙으로 전환되어 정월대보름 당산제와 마을 제사로 이어졌고, 오늘날까지도 마을 공동체의 의례로 전승되고 있다.

소도와 교천은 단순히 제사를 올리던 공간에 그치지 않고 하늘과 인간, 농경의 주기와 공동체적 삶을 통합하는 거대한 영적 축제였다. 오늘날 전북은 이 문화유산을 어떻게 되살려야 할 것인가? 단순한 고대의 흔적이 아니라, 생명과 공동체의 철학을 현대적으로 성숙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첫째, 농경과 생명의 철학을 복원하는 일이다. 소도와 교천은 본질적으로 농경 주기와 맞물린 제의였다. 이를 현대적으로 재현해 봄과 가을 파종과 결실의 계절마다 생명을 존중하는 생태축제를 열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포용과 평화의 영성철학을 계승해야 한다. 소도가 도망자를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기록은 공동체적 포용과 정의의 원형을 보여준다. 옛 제천문화를 복원하는 차원을 넘어, 사회적 약자와 외국인 노동자까지 품는 인권과 평화의 성소가 될 수 있다.

셋째, 예술적 창조와의 융합이다. 최근 애니매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가 남산타워와 고궁, 까치와 호랑이 민화를 무대 위에 되살려내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솟대 세우기와 제천의례의 재현은 이 땅이 생명의 성소임을 상기시키며, 무용극·음악·시각예술을 통해 현대적 예술로 재창조하는 작업을 추진하자.

마한의 소도와 백제의 교천은 자연을 경외하고 생명을 존중하며 공동체를 화합시킨 영성문화였다. 전북이 ‘제천의례와 영성의 성소’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에서 문화강국의 수도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박광수(원광대학교 명예교수, K-전통문화학술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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